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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기념탑과 근현대사기념관

그때 그리고 지금 [2018.04] 4월의 하늘은 그때도 푸르렀을까?
4·19기념탑과 근현대사기념관

글 양가희 사진 봉재석

 

토머스 제퍼슨은 1786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발생한 ‘셰이즈의 반란’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폭군의 피를 먹고 자란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4월만 해도 올해로 70년을 맞는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이 있고 4·19혁명 기념일이 있다. 4월을 맞아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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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4·19  기념탑은 국민 성금으로 세웠다

 

민주주의 혁명을 기리는 경건한 공간

오늘날 선거는 국민이 직접 공직자나 대표자를 선출하여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대표적인 수단이자 기본적인 권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50여 년 전만 해도 독재 정권의 감시 아래 3~5인조 공개 투표, 부정 개표가 진행되어 선거에서 제대로 된 의사를 반영하지 못했다. 4·19혁명은 선거권을 보장받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시민과 학생이 중심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다. 1960년 4월 19일은 푸른 봄날이었지만 독재에 항거하던 수많은 사람이 희생됨으로써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린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4·19 기념탑과 국립 4·19 민주묘지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이 날을 기리고자 제막된 곳이다. 정문과 다목적광장을 지나 참배로에 들어서면 먼저 높이 솟은 4·19 기념탑이 눈에 띈다. 불의와 독재에 항거한 많은 사람의 희생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사월학생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를 구성한 후 같은 해 11월 기공해 전 국민의 성금과 국고 보조로 1963년 9월 20일 제막했다고 한다. 그 높이만 해도 21m에 달하는데 4·19 혁명의 드높은 기상을 표현했다. 총 7개의 화강석 탑주는 4·19 혁명 당시 민중의 형상을 반추적으로 표현한 ‘군상환조’를 가운데에 두고 둘러싼 형태로 세워져 있다. 마치 피를 흘리며 쓰러진 민주열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라는 기념탑 비문처럼 군상환조를 감싼 4·19 기념탑의 하늘은 침묵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매년 4월이면 민주 영령들에게 참배하고자 많은 사람이 이곳에 방문한다. 사전에 참배 신청을 한 후 헌화를 준비해 4·19 기념탑 앞 제단으로 오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헌화와 분향을 마친 후 경례·묵념하며 국립 4·19 민주묘지를 둘러보는 것이 보통이다. 4·19 혁명 희생자와 공로자가 안장되어 있는 국립 4·19 민주묘지는 총 면적 9만 6,837㎡로 4개의 묘역으로 구분 된다. 4·19 혁명의 발화점이 된 김주열 열사의 묘소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희생자가 6명이나 안장되어 있다. 10만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들 사이에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들도 포함되었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독재정권을 향해 외쳤던 초등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시민들과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들에게도 번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빠와 언니들은 / 피로 물들었어요 / 오빠와 언니들은 / 책가방을 안고서 / 왜 총에 맞았나요’
(1960년 서울수송 초등학교(당시 서울수송 국민학교) 4학년 강명희 作 <나는 알아요>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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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립 4·19 민주묘지 묘역. 4·19 혁명의 희생자와 공로자를 태극기와 무궁화가 지키고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전하는 근현대사기념관

4·19 기념탑과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자리 잡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는 우리나라의 독립 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근현대사기념관도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선열들이 그토록 바라고 외치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이념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상설 전시가 열리는 1층은 시대별로 A, B, C존으로 나뉜다. A존은 제국주의 열강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전쟁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3·1운동 과 독립전쟁이 펼쳐져 있다. 진열된 전시품은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들이 신분과 계급의 평등을 강조하며 둥글게 이름을 적은 사발통문과 일제강점기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가 낭독한 3·1독립선언서 등이다. B존에는 어릴 때 8·15 광복을 맞은 주인공이 청년이 되어 4·19 혁명을 겪은 후 깨달은 점을 아버지에 편지로 전하는 영상이 준비되어 있다. 독재 정권에 억압받으며 간절해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영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C존은 민주주의 신호탄이 된 4·19 혁명의 계기와 과정, 그 의의가 시간 흐름에 따라 설명되어 있다. A·B·C존을 차례차례 지나면 선열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우리나라가 발전되어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4·19 혁명 이후 곧바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3년 후 또 다시 독재정권이 재집권하면서 부마 민주항쟁(1979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 6월 민주항쟁(1987년) 등이 이어졌다. 국민의 권리를 되찾는 데는 오랜 시간과 크나큰 희생이 필요했다. 근현대사기념관을 둘러보면 4·19 혁명 이전의 사건들은 1960년 첫 민주주의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고 또 그 이후의 사건들에 기폭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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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리의 근현대사를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혁명과 열망의 기록은 계속된다

근현대사기념관 안에는 각각 자유와 평등, 민주라고 새겨진 스탬프를 찍는 참여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다. 후세에 민주주의 정신을 전하려 애썼던 선열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현재 세대들도 미래 세대에게 그 가치를 계승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 가치를 이어받듯, 2017년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국민들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고 정권 퇴진을 요구했던 ‘촛불혁명’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런 의미에서 4·19 기념탑과 국립 4·19 민주묘지, 근현대사기념관은 과거와 현재, 미래 세대들이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로 연결된 곳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는 촛불혁명도 이 공간에 기록되어 후대로 전해질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은 결코 그냥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도 많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돌아보게 되는 4월. 우리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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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소박한 규모의 근현대사 기념관은 4·19 민주묘지에서 도보 이동 가능하다

 

 

화면해설.

이 글에는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4·19 기념탑 사진, 국립  4·19 민주묘지묘역 사진, 민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쓰여진 사진, 그리고, 근현대사기념관 전경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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