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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인권 [2018.04] <돈 조반니>와 ‘미투 운동’

글 이채훈

오페라 역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의 싹을 보여준다. 주인공 돈 조반니는 스페인 전설에 나오는 희대의 바람둥이다. 그가 ‘정복’한 여성은 하인 레포렐로가 부르는 <카탈로그의 노래>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640명, 독일에 231명, 프랑스에 100명, 터키에 91명, 그리고 스페인에 무려 1,003명”이다. 그는 “농촌 처녀, 도시 처녀, 하녀, 백작 부인, 남작 부인, 후작 부인, 공주님 등 모든 계층, 모든 용모, 모든 연령의 여성들”을 유혹한다.

 

사진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카탈로그의 노래> (글라인번 오페라 공연 실황)
▶ https://youtu.be/JtJ1VqeyrCI

 

“금발 미녀는 세련됐다고 칭찬하고, 은발 여자는 달콤하다고 칭찬하고, 갈색 머리 여자는 마음이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겨울에는 통통한 여자를, 여름에는 마른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가 가장 열정을 쏟는 상대는 나이 어린 처녀”다. 돈 조반니는 자신이 ‘정복’한 여성의 이름을 일일이 목록에 적어놓았다. 그는 전리품 목록이라도 되는 양 은근히 자랑스레 여기지만, 사실상 범죄 목록과 다를 바 없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피해 여성 중 돈나 엘비라는 수녀원에 있다가 그에게 유혹당해 세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돈 조반니를 찾아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가 위기에 처하면 연민을 느끼며 혼자 갈등한다. 돈 조반니는 우연히 그녀를 마주쳐서 입장이 난처해지자 하인 레포렐로를 시켜서 <카탈로그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자신이 상습범임을 밝히며, 그녀는 첫 피해자도 아니고 마지막 피해자도 아니니 더 이상 집착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인 돈나 엘비라를 모욕하여 그녀에게 ‘2차 트라우마’를 가한 셈이니 이 또한 악행이다. 돈 조반니는 돈나 엘비라에게 결혼을 약속해서 유혹한 뒤 달아난다. 돈나 안나를 속여서 추행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완력을 사용했고, 소동에 놀라서 뛰어나온 그녀의 아버지 기사장을 살해한다. 새 신부 체를리나에게는 “농사꾼과 평생 살기엔 아깝다”며 팔자를 바꿔주겠다고 한다.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젊은 여성을 유혹한 것이다. 그는 모든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주장하지만 등을 돌리는 순간 모든 사랑은 거짓이었음이 판명된다. 돈나 안나와 약혼자 돈 오타비오, 체를리나와 신랑 마제토는 돈나 엘비라와 함께 그를 추적하여 응징하려 한다. 오페라 <돈 조반니>는 약자들의 연대로 정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미투 운동’의 정신과 닿아 있다. 프랑스혁명 2년 전인 1787년 초연된 이 작품은 귀족의 악행을 고발하고 풍자해 낡은 신분 사회의 붕괴를 예고했다. 정치적 변방인 프라하에서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이듬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두 번 공연된 뒤 귀족들과 체제 순응적인 음악가들의 격렬한 비난 속에 황급히 막을 내려야 했다. 모차르트는 최고 걸작 때문에 기득권층의 미움을 사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는 역설적 상황을 겪어야 했다. 선남선녀의 힘으로 귀족 신분인 돈 조반니를 정의의 법정에 세우기 어려웠던 시절, 모차르트 또한 시대의 벽 앞에서 힘겨워했다. 돈 조반니를 미화하고 예찬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는 희곡 <동 쥐앙>에서 “지상의 모든 규칙에 반항하는 자,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희망하는 자, 모든 권위를 조롱하고 위선을 풍자하는 아나키스트, 시대가 강요하는 관습과 믿음에 반기를 드는 자, 심지어 자신의 본능을 옹호하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자”로 그를 묘사했다.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이 오페라를 극찬했다. 그에 따르면 돈 조반니는 속물 세계의 윤리를 뛰어넘는 미적 실존의 영웅이다. 그는 공감력이 뛰어나며, 상대의 마음으로 신속하게 들어가서 하나가 된다. 그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하며, 그의 에너지는 고갈될 줄 모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천재’ 돈 조반니를 묘사하려면 문학보다 음악이 제격이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괴테의 <파우스트>를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고전(古典)이란 “인간에 대한 성찰을 통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영혼의 근력을 키워주는 작품”을 말한다. 음악의 대향연이자 다양한 인물군상이 펼치는 인간성의 파노라마 <돈 조반니>는 변함없는 고전 오페라로 사랑받을 것이다. 그러나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시대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바람둥이 돈 조반니를 미화한 과거의 시각은 불가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미투 운동’ 앞에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이채훈 님은 MBC PD로 일하다가 해고된 후 클래식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클래식 400년의 산책>,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 등의 책을 쓰고 있습니다.

 

 

화면해설.

이 글에는 모차르트 <돈 조반니> 오페라 공연 중 한 장면인 돈 조반니가 여러 명의 여자에 둘러쌓인 모습의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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