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 > 사람, 삶을 말하다 > 할 수 있는 만큼 보듬고, 돕다 - 젠더 폭력 예방 전문 강사 박하연 경사

사람, 삶을 말하다 [2018.05] 할 수 있는 만큼 보듬고, 돕다 - 젠더 폭력 예방 전문 강사 박하연 경사

글 박보라 사진 봉재석

 

그는 경찰이다. 그리고 강사다. 성폭력 예방 교육부터 인권 교육까지 강의를 위해 전국을 다닌다. 피해자들을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필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바쁜 스케줄을 감내한다.

 

짧은 머리의 박하연 경사가 검은 자켓을 입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음료수를 앞에 두고 상대를 바라보는 모습이며, 두번째 사진은 팔짱을 끼고 서서 웃는 모습입니다.

 

성폭력 사건, 그 너머를 바라보다

공공기관, 사기업, 학교 등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한 기간만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그사이 끊이지 않았던 수사와 강의 속에서 이제 박하연 경사는 성폭력 그 너머를 본다. “나는 피해자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저 멀리 앉아 있는 피해자의 눈빛과 마음이 읽힌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그들의 심리적 고통과 분노가 느껴진다.
“외부 강의를 오래 하다 보니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요, 아닌 사람이 있어요. 아닌 사람들이 대체로 가해자의 입장에 서죠. 청중 안에 그런 눈빛이 많다 생각될 땐 강의도 세게 합니다. 사건 사례도 풀어주고, 직설적으로 얘기해요. 그러다 가끔 그 속에 숨어 있던 피해자가 눈물을 흘릴 때도 있어요. 그때마다 느끼죠. ‘미투(#Me_Too)’는 진짜 우리 모두의 일이구나.”


박 경사는 조금만 힘을 실어주어도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잡는 피해자를 많이 봐왔다. 강간 피해로 한국을 떠났던 여자들, 직장 내 성폭력이 모두 자기 탓이라 여겼던 여자들이 느끼는 수치심을 거두어주려고 노력한다. “수치심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느껴야 할 감정이지요. 생각해보세요. 피해자들은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에요. 화가 나고, 황당하고 불쾌한 거죠. 무섭기도 할 거고. 복합적인 마음이에요. 그 복잡한 감정에 나 스스로가 수치스럽단 생각은 없을 거예요.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이 강요했을 확률이 커요. 넌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박 경사는 우울해하고 괴로워하는 피해자들의 마음상태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도움을 주려 애쓴다.


“어젯밤에도 SNS로 연락이 왔어요. 동생이 직장 동료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피해자들은 고소 자체를 두려워해요. 소문이 날까 봐, 앞으로의 인생에 문제가 생길까 봐. 힘들겠지만, 피해자는 이 시기를 잘 이겨내는 게 중요해요.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의식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모두 범죄예요. 이 위기를 현명하게 잘 이겨내도록 도움이 되고 싶어요.”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돕고 그들의 마음까지 돌보고픈 박 경사. 강의를 계기로 수많은 피해자를 알게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얘기를 조금이라도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는 늘 감사하다.

 

옳은 일을 하고 싶었던 소녀

“이게 아니다 싶으면, 늘 손들고 말해.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아버지의 이 말씀 덕에 작은 소녀는 경찰을 꿈꾸게 됐다. 박 경사는 학교나 사회에서 겪었던 불합리한 처우와 폭력에 늘 맞서며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선생님이 여자아이들의 발육 상태를 점검한다며 가슴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성인인 선생님이 무서웠을 텐데 “하지 마세요”라고 정확히 말했다. 마땅한 이유 없이 체벌을 받을 때는 “왜 맞아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를 올바르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직업으로 이끌었다. 이왕이면 힘이 있는 사람이 좋겠다 싶었고 자연스레 경찰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들에겐 큰 상처가 있어요. 발달 장애인의 경우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했단 자괴감도 남고요, 성폭행 피해자들은 피해자임에도 행실이나 원인 제공 등을 빌미로 손가락질받는 괴로움이 있어요. ‘네가 이러하니 그런 일을 당했지’ 같은 가해자 중심의 사고가 계속된다면 피해자들 마음 안엔 늘 고통과 공허함만 남아 있을 거예요.”

 

장애인 중에는 사건 자체를 ‘사건’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40년 이상 학대를 받으며 머슴살이를 했던 장애인을 가해자로부터 떼어내려 했더니,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정 때문에 분리가 힘든 사건도 있었다. 학대로 한쪽 시력을 잃었는데도 가해자와 본인을 부모 자식 관계로 인식한 탓이다. 오랜 시간 상담과 치료 끝에 결국 그 관계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지금은 보호시설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일이 상상 이상으로 많아요. 이러한 피해자를 돌보기 위해선 국가 차원에서 해줘야 하는 일이 있어요. 시설도 있어야 하고, 돌봐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이런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마련하려면 사회적 인식이 많이 변해야 해요. 사회에서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필요하죠. 나와 똑같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란 인식. 그 당연한 인식이 보편화되어야 인권을 짓밟는 범죄도 줄어들고, 피해자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어요. 모두를 위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거예요.” 피해자를 위한 빛이 되어 성폭력 예방 교육을 마치고 나면 으레 몇몇 청중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얘기한다.


“강사님을 만난 순간 환한 빛이 켜진 것 같아요. 저는 그늘에 숨어 있는 피해자였는데, 이번 강의를 들으니 제가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강사님이 제 인생의 빛을 찾아주셨어요!” 언제부턴가 박 경사는 사회적 편견에 떨고 있던 인권 범죄 피해자들을 양지로 끌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수치스러움을 느껴야 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부끄러워하기보단 건강하게 분노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약자를 짓밟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권위의식보다는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국민이 ‘피해자’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사법기관 사람이에요. 그러면 경찰, 검찰이 성 의식이 높아야 하지 않겠어요? 사실 지금은 국민들의 성 의식이 훨씬 높아요. 사법기관은 대한민국 국민이 믿고 있는 최후의 보루예요. 그걸 좀 진보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 행정기관, 사법기관 등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도 많이 하고 있어요.”


피해자들의 고통을 품고 극복할 수 있게 돕는 박 경사는 ‘바꾸고 싶다면 당당히 말하라’던 아버지를 늘 떠올린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고통과 기쁨을 함께 느끼고 공감할 줄 아는 경찰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사회적, 심리적 어둠 안에 사는 많은 피해자가 믿고 지지할 수 있는 존재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래야 성폭력범죄를 예방할 수 있어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고, 삶이 있어요. 그 누구도, 무엇을 이유로 해서든 그 삶을 짓밟을 수는 없어요. 우리 모두는 평등하니까."

 

화면해설.
이 글에는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하연 경사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