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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슈 [2021.06] 차별에 찬성하는 반대는 허용될 수 없다

글 오찬호(사회학 연구자)

 

차별에 찬성하는 반대는 허용될 수 없다

 

한국인들에게 이주노동자, 다문화를 떠올리라고 하면
십중팔구 특정한 모양새를 떠올린다.
이주노동자란 말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노동자인데,
누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백인 미국인 제임스,
대기업에서 일하는 백인 영국인 토니를 생각하겠는가.

 

“나는 그냥 차별할래요. 제가 속물이라서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그나마 솔직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그래도 차별이 문제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인정 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대화가 이어져 나가지 않겠는가. 이를 괜찮다고 할 정도라는 건,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의 당당한 언행을 접하는 게 빈번해서다.

 

차별을 차별로 이해하지 않는 건, 자신을 합리적이고 정의롭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악’을 제거하는 것은 ‘선’이라는 믿음이 강건하기에 더 용감하다. 아파트 단 지 안에 철조망이 생겼다는 뉴스를 떠올려보자. 처음엔 출몰 하는 멧돼지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임대동 주민들이 분양동 구역으로 오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니, 이런 과감성 밑에는 무엇이 깔려있겠는가. 놀이터에 ‘임대주민들 사용금지’라고 팻말을 박고 장애인과 관련된 그 어떤 시설도, 심지어 학교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며 격렬히 항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유재산 어쩌고저쩌고 그럴싸하게 말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단칼에 분류해 서 공간에서 배제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자신이 옳은 행동을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지만 가능하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쉽사리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전쟁터에 나 간 군인의 모습이랄까? 그만큼 이들은 ‘저들의 문제는 명백하고, 그렇기에 나는 이들로부터 동네를 수호하는 중’이라는 숭고함으로 가득하다. 차별은 그렇게 덮인다.

 

같은 국적을 지녀도, 같은 지역에 살아도,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기어코 ‘너와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님’을 확인하겠다고 이 모양인데 애초에 공동체 안에서 쉽사리 볼 수 없었던 낯선 존재를 밀어낼 때는 어떠할까?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을 만큼 공격적일 것이고 이와 비례하여 반대편의 누구는 어마 어마한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예를 들어, 몇 해 전에 있었던 ‘예멘 난민’ 이슈를 보자. 난민 수용 찬성이든 반대이든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반대에도 격이 있어야 하고, 표현의 자유가 왜 중요한지가 느껴져야 한다. 당사자가 토론회장에 앉아서 자신들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모멸감을 느끼지 않는 반대여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은 난민 수용을 하기에 여러모로 ‘구조적 미흡함’을 지니고 있으니 괜히 와서 고생하지 말라는 식의 반대라면 어떤 의미에선 당사자에게 좋은 정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차별에 찬성하는 반대는 허용될 수 없다

 

하지만 그랬는가? 표현의 자유랍시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특정한 인종, 특정한 지역에 대한 자신이 알고 있는 편협한 정보를 인류의 보편적인 합의처럼 뱉어낸다. 그리고 처음부터 부정적으로만 해석되었던 ‘그 종교’를 언급하며 혐오 수위를 높인다. 장황하게 설명되지만 요약하면 “이슬람 = 나쁜 종교, 무슬림 = 나쁜 사람” 아니겠는가. 누구를 극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필연적으로 차별의 연료로 작동한다. 이를 테면, “딸 가진 부모라면 이슬람 종교를 믿는 사람을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라는 무슨 십자군 원정대의 각오가 꿈틀거리는 걸 여기저기서 마주하는 게 전혀 희소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람을 난도질한 경험은, 차별에 더 둔감해지게끔 한다. 이슬람의 ‘이’ 자만 들어도 화를 내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유다. 최근에는 이슬람 사원을 둘러싼 논쟁, 정확히는 논쟁도 아니고 ‘혐오’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 사원이란 게 ‘모스크’를 검색하면 등장하는 그런 웅장한 건축물이 아니라 대부분이 상가 건물의 한 곳이거나 원룸 등을 빌리는 수준이다. 가끔 신축건물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도시를 걷다 보면 쉽사리 마주하는, 지나치게 화려하기만 한 교회들에 비하면 그 규모와 위압감이 백분의 일 수준도 되지 않는다. 낯선 외지에서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 의지하는 작은 공간에 불과한데, 이건 모든 외지인들에게 버팀목 아니었던가. 다른 나라로 이민한 한국인들이 한인교회 공동체에서 서로 연대한 것은 심지어 도덕적으로 해석되면서, 한국에 온 외국인이 뭐 하는 건물인지 티도 안 나는 작은 공간에서 경건히 기도하는 것에는 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일까?

 

사람에 따라 이슬람 종교를 우호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싫어한 사람들이 하지 않았던 행동을 ‘그 종교’이기에 할 순 없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든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교회 십자가, 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들이 일요일 오전마다 몰고 온 차들이 근방을 주차 지옥으로 만든 지가 수십 년이지만 ‘개신교’라는 종교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고 한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 주거단지 내에 어떤 종교시설도 생겨서는 안 된다!’라고 외치는 건 이해될 수 있지만, 전 세계 13억 명이 믿는 종교를 콕 집어 거적때기처럼 다루는 건 이미 그 종교와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차라리 집값을 생각하면 사원보단 백화점이 좋지 않을까 하는 모든 걸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평등하게 보겠다는 속내를 드러내는 게 더 솔직해 보인다. 그러면 최소한 돈의 노예일지언정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 않은가.

 

차별에 찬성하는 반대는 허용될 수 없다

 

아마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고 운운하며 반론할 사람이 있을 거다. 공정하지 않다. 나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 영어강사들이 클럽에서 사고를 일으키고 마약 소지자로 체포되었다고 해서 그 지역이나 그들이 믿는 종교를 문제 삼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미국인 보고 ‘총 쏘는 나라에서 왔는데 칼부림도 자주 할 것이다’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없었고, 영국인을 ‘축구하다가 서로 때리는 사람들이니까 일상에서도 폭력적일 것이다’라면서 꺼림칙하게 대하는 경우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니까, 그런 것일 거다. 이걸 사람 가려가며 적용하니까 문제다.

 

반대는 자유지만, 어떤 반대이든 사회적 공익과 결이 닿아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사회라는 말은 ‘인류’보다 하위 범주다. 그러니 어떤 종교, 어떤 인종, 어떤 지역을 비판하는 수준이 아니라 차별받아도 마땅한 부류로 포장하여 보편적 인권에서 배제시키도록 하는 논의는 최소한 공론장에서 등장해선 안 된다.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것, 군부대의 사격장 확장을 반대하는 것 등은 님비현상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래도 함의가 있다. 논쟁은 차치하고, “원자력의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자”, “미래세대는 총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았으면” 등의(추상적이지만) 인류애가 가득한 결론이 가능하다는 거다. 하지만 “사원 건립을 반대하여, 우리 아이들을 이슬람 종교로부터 지켜내자!”, 이런 목표의 반대는 사회적으로 허용되기 어렵다.

 

차별은 우리 안에 있다. 한국인들에게 이주노동자, 다문화를 떠올리라고 하면 십중팔구 특정한 모양새를 떠올린다. 이주 노동자란 말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노동자인데, 누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백인 미국인 제임스, 대기업에서 일하는 백인 영국인 토니를 생각하겠는가. 문화는 어떠한가. 노골적으로 말해,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 엄마의 가정은 다문화지만 프랑스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의 가정은 그냥 ‘외국인 가정’으로 불리지 않은가. 애초에 판을 이렇게 깔아놓고 있으니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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