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함을 없애 주세요.”

얼마 전 상담센터로 전화한 여성 내담자의 절박한 요청이었다. 이 여성은 가족간 금전 문제로 인해 야기된 갈등으로 2007년 7월부터 약 한 달간 제천 소재 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고 한다. 입원 당시 병원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함이 벽에 부착되어 있었고 자물쇠도 단단히 채워져 있었단다.

당시 내담자를 비롯한 입원 환자들은 진정함 열쇠를 ‘당연히’ 국가인권위원회가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간호사와 보호사의 눈을 어렵사리 피해가며 달력 등을 찢어 휘갈겨 쓴 진정서를 진정함에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원 측이 진정서를 인권위에 송부하지 않은 채 이를 꺼내본 후 "글씨체를 조사해보면 누군지 다 알 수 있다."며 오히려 환자들을 협박하고, 진정서를 찢어 폐기하였다고 한다.
이에 내담자는 진정함을 병원이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른 환자들처럼 진정서를 넣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진정함을 인권위가 직접 관리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한 가닥 기대를 품은 채 갇혀 있는 불쌍한 환자들이 걱정되어 전화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내담자는 진정함이 말 그대로 ‘형식’ 일뿐 환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 하며, 오히려 병원이 진정서를 넣은 환자들을 요주의 인물로 분류해 협박하는데 악용되기까지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정서를 넣어봐야 소용없는 진정함이라면 차라리 설치를 하지 말거나, 진정함 열쇠를 인권위에서 직접 관리해 주기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인권위법 제31조는 시설수용자의 진정권 보장을 명문화하고 있다. 또 인권위법 시행령 제7조에서는 구금·보호시설의 장은 시설 안에 진정함을 설치하고, 매일 진정함을 확인하여야 하며, 진정함에 진정서나 서면이 들어 있을 때는 지체없이 인권위에 송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함이 피진정기관이 될 수 있는 시설에 의해 관리되는 현실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설 수용자는 언제든지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진정함 열쇠 관리를 위원회가 맡아야 한다는 내담자의 주장에 충분히 일리가 있으나, 위원회 전 직원이 200여명도 채 되지 않는 현실에서 전국의 정신병원, 아동복지시설, 노인복지시설 등의 진정함을 일일이 관리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내담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고 반박했다. 정신병원의 경우만 놓고 보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권위법 제57조에 의하면 정신병원의 진정서 개봉 및 은닉, 폐기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따라서 내담자가 주장한 진정방해행위는 인권위에 진정이 가능함을 설명하였으나, 진정으로 인한 불이익, 가령 재입원이 우려된다며 진정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정신병원 등 다수인 보호시설에서 인권을 침해당한 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진정함을 피진정기관인 해당 병원이 관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물리는 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신병원 또한 내부의 인권침해 사실을 고발하는 진정서를 아무런 사심 없이 인권위에 송부하기 보다는 은폐의 유혹을 쉽게 떨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생각 같아서는 내담자의 말대로 인권위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전국의 정신병원 등지를 돌며 진정서를 수거하면 좋겠지만, 사실 지금은 진정함 설치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인권위의 업무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상담을 하면서 가장 답답하고 속상한 일은 내담자가 지적한 문제에 정확히 공감하면서도 당장 그 지적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해 줄 수 없을 때이다. 앞으로 진정함이 정신병원을 비롯한 시설 수용자들의 진정한 인권지킴이가 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글: 황정아(국가인권위원회 전문상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