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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2016.01] 건강한 적자 착한 적자

글 박영희 사진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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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9월, 자혜의원으로 개원한 진주의 료원이 2013년 5월 마침내 폐원했다. 경상남도에 새 도지사가 취임한 지 꼭 65일 만이었다.
홍준표 도지사가 밝힌 진주의료원 폐업 이유는 장기간 누적된 적자 운영이었다. 그러나 '공공의료 정상화를 위한 국정조사 보고서(2013. 7.)'를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전국 34개 지방의료원 중 적자를 기록하지 않은 공공 의료원은 단 한 곳도 없으며, 서울ㆍ부산ㆍ군산의 경우 진주의료원(279억 원)보다 부채가 더 많았다. 더욱이 진주의료원은 2008년 신축·이전에 따라 발생한 부채(136억 원)를 감안한다면 여타 의료원과 비교해 누적 부채가 결코 많지 않다는 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의 의견이다.



┃  공공 의료원은 민간 병원과 다르다

2001년 입사한 오주현 씨는 진주의료원 폐원 때까지 줄곧 원무과에서 일했다. 하여 그는 환자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병원의 수납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 원무과잖습니까. 10여 년 넘게 그 일을 하면서 배운 것도 많죠. 공공 의료원과 민간 병원은 출발부터 다르지 않겠습니까. 진주의료원을 찾는 환자의 경우 연령대가 상당히 높은 편인데, 보험 환자보다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더 많다고 보면 됩니다. 병상이 장기 입원 환자로 넘쳐났으니까요.”
수익성에서 보면 진주의료원은 그처럼 민간 병원을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구조였다. 한마디로 돈이 안 되는 환자들만 모인 셈이었다.

“병실 물갈이 차원에서 진주의료원도 20일 입원에 7일간 퇴원 원칙을 지키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어야 말이죠. 도(道)의 지침대로 의료원에서 강제 퇴원을 시킨다면 환자들은 어디로 가죠? 원무과 업무 중에서 그 점이 늘 난제였어요. 강제 퇴원은 곧 빈궁한 환자들에게 죽으라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단 말이죠.”
주현 씨의 하소연에 세계보건기구 창립 헌장 서문이 스쳐갔다. '인종, 종교, 정치적 신념, 경제적 혹은 사회적 조건에 따른 차별 없이 최상의 건강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의 하나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1946년에 창립된 세계보건기구 가입국이다.
“도에서 미수금 관리를 철저히 하라며 다그치기에 환자의 가정을 직접 방문했어요. 한숨이 먼저 나오더군요. 환자의 처지를 보는 순간 미수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42만원을 받으러 갔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안타까운 현실만 보고 온 셈이죠.”

2008년 진주의료원이 월아산으로 이전할 즈음 주현 씨는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했다. 의료원 주변이 온통 논밭뿐인 데다 시내버스 노선마저 없었다.
“원무과 입장에서 보면 불안할 수밖에요. 장소가 너무 외져 환자들 접근성이 제로에 가까웠단 말이죠. 호스피스 병동은 그보다 더 위험해 보였고요. 물론 공공 의료에서 응급실과 호스피스 병동 운영은 꼭 필요한 사항이긴 합니다. 하지만 적자로 허덕이는 응급실에 호스피스 병동까지 개설 했다면 부채가 누적되는 건 당연한 결과 아닐까요.”
주현 씨의 염려대로 병원이 술렁였다. 적자 운영이 계속되면서 자구책으로 임금 동결, 연차 반납, 토요일 무급 근무 등 할 수 있는 건 다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주말 근무는 어렵겠다며 의사들이 먼저 병원을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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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같았으면 그 200억으로



2008부터 2010년까지 진주의료원 원장으로 재직한 김양수 씨는 자신의 부친 이야기부터 꺼냈다.
“부친께서 진주의료원 내과 과장으로 재직해 나 또한 지역 의료 봉사에 마음을 두고 있었던 건 사실이네. 부친께서 재직하던 1960년대만 해도 의료원에 간호기술고등학교를 설립해 졸업생들이 파독 간호사로 많이 나갔거든.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의료원 원장 자리마저 정치하는 사람들의 보은 인사로 활용되지 않겠나. 원장이 무시로 바뀐 것도 그 점이 컸었네. 도지사마다 서로 자기 사람을 앉히려 하니 병원 분위기가 뒤숭숭할 수밖에.”
재직 당시 김 씨에게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3년 임기가 아직 남은 상태에서 나가달라는 소리를 전해 들은 김 씨는 기자회견으로 맞붙을 놓았다. 

“그건 그렇고, 공공 의료에 수익성 잣대만 들이댄다면 단연코 반대일세. 진주의료원만 보더라도 그동안의 적자가 쌓여 그렇지 문까지 닫을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지. 물론 나야 직원들 임금 체불문제 해결이 급선무이긴 했지만. 임금이 벌써 6개월째 체불되고 있으니 어찌 원장 마음이라고 편할 수 있겠나. 그들도 나처럼 월급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이건 내 입장을 밝히는 것이니 오해가 없길 바라네. 도에서 폐업 이유로 제시한 '강성 노조' 문제인데,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네. 서울에 사무실을 둔 전국보건노조라면 또 모르겠지만 진주의료원 노조는 어수룩할 정도였단 말이지. 무얼 몰라서 정치적 논리에 당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네.”

그러면서 김 씨는 서둘러 폐업한 진주의료원에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일개 민간 병원도 개원하면 최하 3~4년은 지켜본단 말이지. 하물며 직원을 232명이나 둔 진주의료원은 어떠했나. 모름지기 10년은 지켜봤어야 할 병원을 폐업시키는 데만 몰두하지 않았느냔 말일세. 그것도 모자라 폐업한 의료원을 절대 (경남도청) 서부청사로 사용하지 않겠다던 약속마저 저버린 채 아까운 건물을 때려부수고……. 나 같았으면 서부청사 리모델링 비용으로 들어간 그 200억으로 의료원 빚부터 갚았을 것이네. 아쉬운 대로 그때 200억만 밀어 넣었어도 진주의료원은 재생 가능성이 무척 높았단 말이지.”

회한에 잠긴 듯 잠시 숨을 고른 김 씨가 마산의료원을 예로 들었다.
“한때 마산의료원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재개원한 적 있는데, 그게 늘 가슴에 가시처럼 남아 있지 뭔가. 지난해 메르스 사태를 겪어 잘 알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공공 의료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았나. 물론 수익을 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해결책도 없겠지만 공공 의료는 탁상공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혹시 자네, 건강한 적자와 착한 적자라는 말 들어봤나? 이 둘을 양손에 쥔 게 바로 공공 의료의 현실이네. 100세 시대에 정부만 바라보고 있는 고령 세대를 어찌할 것인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당장의 수익성보다는 좀 더 멀리 보자는 뜻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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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사들이 무슨 죄가 있죠



2001년, 전정화 씨의 눈에 비친 진주의료원은 실망 그 자체였다. 노후한 건물에 그늘이 깊은 환자들. 어느 한 곳 밝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첫 근무지가 응급실이었는데 노숙자와 행려 환자가 많더군요. 병원에서 사망하면 영안실로 옮겨질 무연고자도 여럿이었고요.”
진주의료원은 그처럼 정화 씨가 꿈꿔온 병원이 아니었다. 더 큰 도시로 떠난 간호학과 동기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간호사한테도 왜 긍지라는 게 있잖아요. 그 꿈이 서서히 이뤄진 게 의료원이 새 건물로 옮겨가면서였는데, 응급의학과가 개설되면서 생각도 달라지고 점차 배우는 것도 많아지더군요. 병원도 활기가 넘쳤고요.”
하지만 그 기간은 두 해에 불과했다. 임금 체불에 수익성 논란이 끊이지 않자 정화 씨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페이 닥터(월급 의사) 문제가 크긴 컸죠. 페이 닥터들이 수시로 바뀌면서 내원하는 환자 수도 눈에 띄게 줄었으니까요. 만성질환 환자일수록 담당의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단 말이죠. 그리고 이 점은 원장이 경영자 출신이냐 의사 출신이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수익성만 따지는 경영자 출신일 경우 의사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의료 쪽에 인맥이 없으면 초빙을 하더라도 돈을 더 쓸 수밖에 없는 구조란 말이죠.”

골치 아픈 건 공중보건의도 마찬가지였다. 정화 씨의 눈에 그들은 마지못해 시간 때우러 온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엄연한 군복무(공중 보건의는 병역 의무 대신 3년 동안 무의촌에서 진료 활동을 한다)인데 심하긴 했어요. 수술 환자 들어오면 뭐라는 줄 아세요? 수술은 돈 많이 받는 페이 닥터한테 넘기라며 거드름을 피우지 않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에는 폐업 소식이 들려왔다. 정화 씨는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가족끼리도 문제가 생기면 서로 대화로 풀어보려 노력하잖아요. 그런데도 도지사라는 분은 병원에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채 폐업만 들먹여대니……. 간호사들이 무슨 죄가 있죠? 우리도 주말 무급 근무에 연차까지 반납하며 할 만큼 했단 말이에요.”

커피숍에서 만난 정화 씨가 눈물을 훔쳤다. 2013년 폐업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12년을 다닌 직장에서 쫓겨나자 견딜 수 없을 만큼 허무하더군요. 나중에 우울증까지 찾아오고요. 3교대 근무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1년을 버텼죠.”
정화 씨가 간호사 가운을 다시 입은 건 지난해 봄이었다. 적어도 딸한테만큼은 엄마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개인 병원에서 일하려니 그동안 쌓은 경력이 제일 아쉽더군요. 신규 말고는 취업이 어렵더란 말이죠. 그렇지만 진주의료원 폐업 때 사직서 제출을 거부한 건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사직서를 쓴다는 건 불의를 인정한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못 쓴 게 아니라 안 썼다는 말을 꼭 하고 싶네요.”

정화 씨와 같은 사람을 또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 정화 씨가 간호사의 긍지를 들려주었다면 김혜린(가명) 씨는 사명감이 돋보였다. 도청에서 두 차례에 걸쳐 퇴직 희망 신청을 받을 때도 혜린 씨는 병원에 남아 있었다. 
“어떻게 간호사가 환자를 병원에 둔 채 먼저 떠날 수 있죠. 전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지 않았네요. 폐업 당시 환자들이 아직 병원에 남아 있었고, 저는 그 환자들을 마지막까지 돌봐야 할 간호사란 말이에요.”
얼마 지나 도청 의료과라며 전화가 왔다. 부산에 있는 요양병원을 알아봐주겠다는 말에 혜린 씨는 씁쓰레 웃고 말았다. 희망 퇴직자 중 대부분이 외지로 떠났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공부한 간호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더구나 저는 진주의료원이 폐원했을 때 다섯 살 된 딸이 있었단 말이죠. 그런 제가 부산을 갈 수 있겠습니까, 마산을 갈 수 있겠습니까.”

더욱 화가 난 건 간호사 연봉이었다. 3000만 원이라는 수치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때마다 혜린 씨는 허탈해 견딜 수 없었다.
“간호사 8년에 3교대 근무, 대학병원 급여의 절반도 못 받고 일했다면 믿으시겠어요? 미래를 보고 다녔지 돈 보고 다닌 직장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자, 한번 보세요. 진주의료원에서 받은 급여명세서니 어느 쪽이 거짓이고 어느 쪽이 참인지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8급 5호봉을 받았던 혜린 씨의 급여는 야간수당을 합해 200만 원이 못 되었다.
“이제 아시겠어요? 제가 왜 사직서 제출을 거부했는지! 의료원에 입사하면 준공무원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그거 하나 믿고 참아왔단 말예요. 간호학과 동기들이 3500(연봉)을 받을 때 1700만 원을 받으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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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 있어야 말이지



2013년 폐업 당시 진주의료원 입원 환자는 203명이었다. 사천시 모 병원에 입원 중인 이갑상 씨의 첫마디에 마음이 울컥했다.
“가족들마저 병들었다고 등을 돌리니 어쩌겠나. 진주의료원에서 울며불며 버틴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네. 돌아갈 집이 있길 하나 반겨줄 가족이 있길 하나…….”
만성폐질환을 앓고 있는 이 씨는 이른바 돈안되는 장기 입원 환자였다. 그런 그가 진주의료원에 입원 중일 때 자신과 같은 환자가 한둘이 아니었다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간병인을 따로 둘 수 없는 처지라 간호사들이 정말 고생 많았어. 똥 싼 속옷까지 빨아 수발해준 게 진주의료원 간호사들이었단 말이지.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주어 늘 고마웠고.”

병원 생활만 20년째. 요즘도 하루 한 벌씩 속옷을 적신다는 이 씨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나 같은 환자를 대학병원이 받아주겠나, 일반 병원이 받아주겠나. 나이 들어 병든 게 서럽지 뭐. 3년 전 진주의료원을 떠날 때도 어떻게든 고향에 남고 싶었지만 돈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 의료원이 문 닫으면서 부표처럼 여기까지 떠밀려온 거네.”
어느덧 팔순으로 접어든 이 씨의 병실에서 나오자 겨울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건강을 향유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와 사회는 그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는 세계인권선언은 과연 유용한 것일까? 몸과 마음이 다 아프다는 이갑상 씨의 마지막 말에 2016년 새해가 더욱 춥게 느껴졌다.



 


박영희 님은 시인·르포작가로 르포집 <만주의 아이들>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등이 있으며, 최근 여행 에세이 <하얼빈 할빈 하르빈>, 르포집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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