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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2016.09] 20만 2000원, 60만 원

글 박영희 사진 이강훈

 

숙소에서 나와 부여 읍내를 둘러보는 길이었다. 장수한의원 나무 의자에 제법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진료를 받으려면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 시각이었다.

 


  “홍산이나 임천처럼 버스가 수시로 다녀야 말이죠. 읍내에 한번 나오려면 큰맘 먹어야 해요.”

 


  구룡, 석성, 충화면 등지에서 첫차를 타고 온 농민들이었다.

 


  “자고 나면 몸이 말을 안 들으니 어쩌겠어요. 침이라도 한 대 맞아야 무릎도 덜 시리고 허리도 펴지는 걸. 그나마 첫차 타고 나온 사람들은 다행이죠. 병원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  사는 게 괴로워요


복금리를 가려면 임천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부여읍에서 임천면을 운행하는 버스는 20분 간격으로 교통이 원활한 편이지만, 충화면 복금리는 하루 다섯 차례뿐이었다. 40호 남짓한 마을에서 만난 양재순 씨의 첫마디가 화살처럼 박혔다.

 


  “사는 게 괴로워요. 허리 아프지, 눈 안 보이지, 걷기 힘들지……. 제일 부러운 게 말 없는 무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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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한 2남 3녀는 서울과 인천에서 산다고 했던가. 고향에 자주 내려오느냐고 묻자 양재순 씨는 자기들도 사는 게 복잡하니까,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나도 서울에서 지내다 이곳으로 온 지 20년 됐는데, 처음엔 못 살 것 같았어요. 영감님이 곁에 있으니까 살았지.”

 


  충청남도 청양이 고향인 양재순 씨가 복금리로 시집온 건 열여덟 살 때였다. 100여 호이던 마을이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마을은 썰렁했다.

 


  “서울에서 목수로 일한 영감님과 내려와 보니 동네가 다 죽어 있지 뭐요. 영감님마저 떠난 뒤로는 사는 게 괴로웠고요. 요즘도 영감님 사진 보면서 혼잣말을 해요. 나는 사는 게 이리도 힘들고 괴로운데 영감님은 참 좋겠다고요. 한갓진 데서 아픈 거 모르고 누워 계시니 얼마나 부러워요.”

 


  매일 오전 10시경 요양보호사가 방문한다고 말하면서 양재순 씨가 혀를 찼다. 다름 아닌 시간 때문이었다. 집안 청소와 세탁을 마치면 요양보호사는 바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잖아요. 얼굴 잠깐 내비쳤다 두 시간 만에 돌아가면 더 외롭고 고독하지요. 진종일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잖아요. 잠에서 깼을 때 허둥지둥 방향을 못 찾고 헤맬 때가 있는데 그때도 서럽죠. 내 몸에서 혼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단 말이죠.”

 


  올해 나이 87세, 양재순 씨의 이야기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숨이 차는지 숨소리도 더 거칠게 들려왔다.

 


  “인천에 사는 큰딸이 전화해서 매일 묻는 말이 있어요, 화장실에 잘 다녀왔느냐고.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드니 화장실 가는 건 오죽하겠어요.”

 


  양재순 씨의 방에서 화장실까지는 5m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양재순 씨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손으로 더듬더듬 문틀을 짚고, 벽을 짚고 움직여야만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노화로 인한 퇴행성 관절염 수술을 받고부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추관 협착증까지 앓고 있는 양재순 씨에게 거동은 고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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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도 안 좋지만, 버스도 못 타요. 다리에 힘이 있어야 차에 오르고 내릴 텐데 그 일이 죽기보다 힘드니……. 택시는 더 어렵지요. 읍내 병원을 가려면 5만 원(왕복)은 줘야 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고요.”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각종 약봉지와 119 직통 라인 전화기였다. 저걸 한 번이라도 사용해본 적 있느냐는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택시 불러서 병원 갈 때는 한 번 타보고도 싶지만 양심에 걸려 할 수 있나요. 나라에 빚이 많다면서요? 그러니 무슨 염치로 119 차를 타겠어요.”

 


  양재순 씨가 노령연금으로 받는 돈은 월 20만 2000원. 한 달 약값과 부식비로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20만 원이면 적지요. 다음 달부터는 기름 보일러도 돌려야 하고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괜한 소리했다가 이거라도 안 주면 콩나물 구경도 어렵게 되잖아요. 뉴스를 보니까 양심들이 비뚤어지긴 한 것 같아요. 돈 있고, 멀쩡한(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까지 노령연금을 주면 힘든 노인들은 더 힘들어지잖아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우리나라가 양심이 무너진 거 같아요.”

 


  하루 일과 중에서 밥해 먹는 일이 제일 힘들다며 한숨을 내쉰 뒤였다. 하루는 수제비가 먹고 싶어 밀가루를 반죽하다 그만두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팔에 힘이 있어야 반죽을 하죠. 그날 이후로 밤도 더 길게 느껴지고, 안 먹던 수면제를 먹게 되고……. 팔십 넘은 노인들이 혼자 살기에는 모든 게 너무 힘들어요. 한 달에 한 번 보건지소로 약 타러 가는 것도 숨이 차니 어서 죽기만 바랄 밖에요.”


┃  벽 보고 먹는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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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금리에서 차로 20분쯤 달리자 팔충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행선 씨의 마당에 예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사흘째 밤나무 밭을 예초하는 중이라고 했bsp; 신행선 씨의 밤농사 면적은 2000평, 한 해 수입은 300여만 원. 이것도 품을 사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2000평 밤나무 밭의 풀을 다 베자면 나흘은 걸리는데, 사람 사서 예초를 했다간 본전치기도 어렵네. 하루 품삯으로 15만 원이 들어간단 말일세. 쌀 한 가마니(80kg)에 12만 원이니, 하루 품삯치고는 꽤 높은 편이지.”


  애를 먹는 건 수확기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손으로 일일이 밤을 줍는 일만도 40여일, 일찍 수확하는 조생종에서 만생종에 이르기까지 밤나무의 종(種)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밤 줍는 일당도 5만 원이니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밤 시세라도 좋으면 모를까 인건비와 생산비를 따져보면 남는 게 없단 말이지. 수입 농산물이 들어온 뒤로 1만 원(1kg) 하던 콩이 4000원으로 뚝 떨어졌으니 무슨 재미로 농사를 짓겠나. 다달이 연금 타 먹고 사는 공무원들이 부럽지 뭐.”

 


  물론 좋은 시절도 없진 않았다. 1970년대 후반, 신품종으로 통일벼가 들어왔을 때다. 200평 논에서 일반미 두 가마니를 수확할 때 통일벼는 네 가마니를 안겨주었다.

 


  “그때만 해도 집에 쌀만 있으면 농사지을 땅은 얼마든지 살 수 있었네. 쌀이 돈보다 더 귀한 때였단 말이지. 나도 그때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바꿔 탔는데, 마을에서 제1호로 구입한 경운기가 기반을 잡아줬지. 땅에 농사를 짓는 것보다 보리 탈곡과 벼 탈곡을 해주고 받는 품삯이 몇 배 더 많지 않겠는가. 그 돈으로 한 평 두 평 농지를 늘려온 것이네.”

 


  하지만 신행선 씨가 배우지 못한 게 있다. 밥 짓고 반찬 만들고 빨래하는, 가사였다. 해외 여행을 다녀올 만큼 형편이 펴자 곁에 아내가 없었다. 팔십 평생 팔충리를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신행선 씨에게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도 커 하루하루가 한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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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에 나갔다 들어왔을 때, 그때가 제일 힘들더구먼. 집에 불은 꺼져 있지, 밥도 혼자 먹어야지. 나이 여든에 처음 알았네. 혼자 먹는 밥은 배가 부르도록 먹기도 힘들다는 걸. 벽보고 먹는 밥이 얼마나 고독한 줄 아는가? 밥 먹다 혼자 울어본 것도 아내가 떠난 뒤였네.”

 


  밥 먹는 팀을 짜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일이 있은 뒤였다. 며느리와 딸들이 번갈아 반찬을 마련해주고 있지만 신행선 씨는 혼자 살수록 외식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마침 팔충리에 홀아비가 넷이어서 의기투합은 곧바로 이뤄졌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외식을 하는데, 며칠 전에도 홍산(면)에 나가 냉면을 먹고 왔구먼. 그동안 자식들 대학 공부 가르치고, 4억 원에 가까운 재산도 만들어놨으니 한 달에 네다섯 번 외식은 괜찮겠지? 사치랄까 봐 묻는 것이네.”

 


  그러면서 신행선 씨는 아내와 떠났던 마지막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내가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제. 1992년부터 싱가포르,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다녀왔으니까. 그런데 가까운 중국을 빼먹었지 뭔가. 여행사에 전화 걸어 사정 이야기를 했네. 내 아내가 다리를 수술한 뒤로 하반신을 못 써 그러니 휠체어를 준비해줄 수 있겠느냐고. 성한 사람도 다니기 힘든 북경 여행을 휠체어를 밀면서 하고 돌아왔네. 생전 아내와 마지막 여행이기도 했고.”

 


  아내가 떠난 지도 어느덧 다섯 해. 휠체어는 아직도 오토바이 옆에 놓여 있었다.

 


  “다 버려도 저것만은 못 버리네. (손으로 휠체어를 가리키며) 아내의 두 발이었단 말이지.”

 


  앞으로 남은 생 여행도 하며, 즐겁게 살고 싶다는 신행선 씨를 뒤로하고 찾아간 곳은 부여읍에 거주하는 이복례 씨였다.

 


┃  6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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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례 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스물네 살에 남편과 사별한 후 50년을 줄곧 혼자 지내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결혼 생활 다섯 해 만에 그런 일이 생겨 서울로 갔지요. 그런데 막상 서울도 내가 살 곳은 아니더라고요. 과자 만드는 공장에 취직해 일을 하는데 물이 안 맞지 뭐예요. 수돗물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부여로 다시 내려온 겁니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 친정 살림이라고 변변한 건 아니었다. 하루 두 끼도 어려웠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건 이복례 씨의 나이 쉰이 되던 해였다. 부여읍에 셋방을 얻은 이복례 씨는 눈만 뜨면 금강 둔치로 나갔다. 지금은 4대강 공사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금강 둔치는 하루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공간이었다. 금강 둔치에 수박, 참외, 단무지용 무를 대량으로 심어 일당 1만 5000원을 손쉽게 쥘 수 있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로 목표가 내 집을 갖는 것이었는데 아쉽긴 했죠. 4대강 공사로 고정적인 일터를 잃은 셈이었으니까요.”

 


  가사도우미와 여관 청소일을 하며 근근이 지낼 때였다.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발끝까지 저려오자 이복례 씨는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건강보험이 안 될 때라 벌어놓은 돈 많이 까먹었어요. 대학병원 병원비가 좀 비싸야 말이죠. MRI 찍고, 영상치료 몇 번 받았더니 모아놓은 돈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빠져나가지 뭐예요. 허릿병(요추관 협착증)이 그렇더라고요. 돈을 쏟아 붓는데도 한 달 못 가서 도지는…….”


 


  이럴 때 남들처럼 자식이라도 하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다공증이 찾아온 건 그 이듬해였다. 집을 나선 이복례 씨는 금강 둔치를 하염없이 걸었다.

 


  “금강 둔치 원두막에서 소나무를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이 생각이 먼저 들??용히 끝날 것 같은. 동기간들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더는 살고 싶지 않더군요.”

 


  그렇게 원두막을 몇 차례 더 찾았을까. 이복례 씨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원두막으로 향하는 발길이 우울증의 시초였다는 사실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죠. 우울증을 고쳐보려고 대학병원만 2년을 다녔으니까요. 병원이 있는 대전에서 부여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서글프던지요.”

 


  전기요금을 아끼느라 이복례 씨는 밥도 이틀분을 미리 지어놓는다고 했다. 독거노인 생활 관리사가 가져왔다는 선풍기도 비닐에 덮인 채였다. 정부로부터 노령연금 20만 2000원과 기초생활수급비로 20만 원을 지원받고 있지만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병원비와 약값으로 들어가는 돈만도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흔넷이면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몸이 성한 데가 없네요. 경로당에 가 점심을 먹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요. 몸만 성하면 설거지라도 해줄 텐데 그조차 마음뿐이니 너무 미안하고 염치없죠. 어떤 날은 눈치가 보여 밥도 잘 안 넘어가고요.”

 


  요즘도 마음이 울적할 때면 어머니의 묘지를 찾아 한바탕 울곤 한다는 이복례 씨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한 달 생활비로 얼마쯤 있어야 숨을 쉬며 살 수 있겠느냐는 말에 60만 원을 제시했다. 그 정도는 있어야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박영희 님은 시인·르포작가로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등이 있으며, 최근 중국 연변 조선족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집 <두만강 중학교> 여행에세이 <하얼빈 할빈 하르빈>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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