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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16.10]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읽기 10> 성적 자기결정권 허용, 어디까지인가?

글 박성철 그림 이한수

 

성적 자기결정권


┃  자신의 삶을 끌고 갈 권리, 자기결정권


「유럽인권협약(Th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제8조 제1항은, “모든 사람은 사생활, 가정생활, 주거와 통신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흔히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로 통칭되곤 하는 이 권리로부터 자기결정권이 도출된다. 자신이 선택한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끌고 갈 수 있는 권리이자 능력을 자기결정권이라고 한다.

 


  자기결정권 행사로 용인되는 선택의 범위에는, 신체나 정신에 해롭거나 위험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포함된다. 단지 사회에서 다수가 옳다고 평가하는 활동만 개인의 선택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자기결정권에서 특히 문제 되는 범주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동성애자의 자기결정권이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ECtHR)에서 자주 문제가 되었다.

 


  유럽인권협약에서 사생활의 권리를 보장하고, 여기에 성적 자기결정권이 포함된다고 하여, 동성애자의 권리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는 건 아니다. 유럽인권협약은 제8조 제1항에서 사생활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같은 조 제2항에서는 무질서와 범죄의 방지, 보건과 도덕 보호 혹은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사생활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판단할 때에도 제8조 제1항과 제2항의 해석과 적용이 자주 문제 된다.

 



┃  유럽인권 재판소, 북아일랜드 동성애 금지는 인권협약 위반 판결


[Dudgeon v. The Uinted Kindom, App no.7525/76 (ECtHR, 22 October 1981)] 사건이 대표적이다. 동성애자들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시금석이 되는 판결이다.

 


  북아일랜드에서 살면서 선박회사에서 일하던 제프 더전(Jeff Dudgeon)은 남성 동성애자 옹호 활동가다. 동성애자 권익 보호를 위한 활동을 하던 중, 그 자신의 성적 활동에 대해 범죄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자 동성애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데에 터 잡은 수사가 인권침해라고 주장하며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했다.

 


  이 사건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성인들 사이에서 서로 동의한 상태에서 행한 동성애를 범죄로 보아 수사하는 북아일랜드의 법률은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하는 유럽인권협약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소는 북아일랜드 법률의 목적으로 '도덕 보호'를 내걸 수는 있다고 해도 그 수단이 적합하고 적절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그런 맥락에서 위 처벌 조항은 민주사회의 질서 유지와 공중도덕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비례의 원칙에 반해 결국 인권협약에 위반된다고 판결했다. 인권협약 제8조 제2항에서 허용하는 제한 범위를 넘어섰다는 뜻이다.

 



┃  동성애자 해고, 사생활의 자유 침해


그 후 군대 내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문제 된 사건이 발생했다. 종래에는 군대 조직의 특수성을 이유로 동성애를 금지하고 불이익을 가하는 법률이 허용되어왔으나, [Smith and Grady v. The United Kingdom App no.  33985/96 and 33986/96 (ECtHR, 27 September 1999)] 사건에서부터 인권협약 위반으로 판단되었다.

 


  영국 공군에 복무하고 있던 청구인들은 근무 중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해고당했다. 영국 국내 사법절차에서 해고가 무효라는 소를 제기했으나 패소하자,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해 심리하게 되었다. 군대 조직은 일반적인 시민사회와는 다른 특수성이 있으므로, 무질서 예방과 도덕 보호를 위해 더 강한 금지와 제재가 허용될 수 있는지 쟁점이 되었다. 이 사건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에서 해고하는 행위는 유럽인권협약 제8조를 위반해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영국 정부는 군대 조직의 특수성 속에서 국가 안보와 무질서 예방을 위해 국내법에 따라 해고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유럽인권재판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소는, 영국 정부가 청구인들의 성적 지향을 조사하고 해고한 행위가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라는 점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판시했다.

 



┃  타인에게 유형력 행사, 처벌 가능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제한이 인권협약이 보호하는 한계 내에 있다고 판시된 예도 있다. [Laskey, Jaggard and Brown v. The United Kingdom, App no. (ECtHR,)] 사건에서는 남성 동성애자가 서로 합의해 가학적인 성행위를 하는 도중에 폭행으로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일이 문제 되었다. 청구인들은 마조히즘(masochism)적인 성행위 역시 성적 자기결정권의 범위 내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인권재판소는 이 사건에서 청구를 기각하고 인권협약 위반에 이르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비록 동성애가 그 자체로 위법이 아니라고 해도 누군가가 타인에 대해 유형력((有形力)을 행사했을 때 어느 정도 범위로 신체적 혹은 정신적 유해를 가한 행위를 처벌할 것인지는 국가가 판단할 수 있는 재량 범위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판단을 전제로 이 사건에서 국가가 가해자를 처벌한 행위는 사생활의 자유와 공공의 안전 사이에 균형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했다.



박성철 님은 변호사로 법무법인 지평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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