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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만난사람 [2016.10] 인생은 60부터

글 정라희 사진 이강훈

 

탁은나 1



고령화 시대인 지금, 60대는 노인이라 하기에 다소 이른 나이가 됐다. 어느덧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은 위로가 아닌 현실로 자리했다. 오래 사는 것이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려면 '우리의 미래'인 노년의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모니터링단원이자 시민기자로 활동하는 탁은나 씨 역시 60대를 앞두고서야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노년에 들어서며 그녀가 얻은 최대의 수확은 자신만의 확고한 삶의 기준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20대에 겪을 법한 역동적인 변화는 아니어도, 지나온 삶을 관조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현재'를 즐기는 법도 깨달았다.



┃  평범한 삶을 이룬 매일의 최선


첫눈에도 탁은나 씨는 활기찼다. 딸이 지금 대학생이라니, 객관적으로 봐도 아직 '할머니'라 불리기에는 억울할 듯싶었다. 오래 기다려 낳은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덕분에, 조금은 더디게 나이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인사를 나누던 그녀는 “성공한 사람도 아닌데, 제가 할 말이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녀는 평생을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하지만 '평범'이라는 소박한 단어로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운과 노력이 필요한지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결혼 이후 사회생활에서는 한걸음 물러났다. “그때는 결혼하면 여자들은 다 일을 그만두던 시대였다”는 말로, 그녀는 지난날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스물일곱에 결혼하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어요. 제가 서른셋이 되던 해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죠. 이후에도 홀시아버지를 계속 모셨습니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몇 년간 병시중을 들었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며 불편함은 있었어도 며느리로서 기본은 다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 또 다른 질문이 솟았다. 
  “저 자신에게 '아버님이 빨리 돌아가시길 바라는 거니?' 하고 되물어봤죠. 그때부터 다시는 그런 생각일랑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그저 그 자리가 저에게 주어진 거라고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덕분에 시아버지가 소천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평범한 삶은 쉽지 않았다. 가정의 기쁨이 되어줄 아이 소식이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마흔두 살이 돼서야 어렵사리 첫아이를 낳았다. 그때 알았다. 인생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종교는 없었지만, 운명은 하늘이 허락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저도 늦둥이였어요. 어머니가 저를 마흔에 낳으셨죠. 어머니도, 시어머니도 돌아가신 후에 아이를 낳았으니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물어볼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육아 서적을 사서 부지런히 읽었죠. 그때는 잘해보겠다고 했는데, 백 가지를 알아도 백 가지를 다 할 수는 없더라고요.”



┃  열심히 살아도 위기는 오더라


뒤늦게 찾아온 육아의 행복을 만끽하기도 잠시, 딸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집안이 흔들리는 '사건'이 생겼다. 공무원이던 남편이 동료와 맞보증을 섰다가 동료가 빚을 갚지 않아 집을 날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오갈 데 없는 가족을 받아준 이는 경기도 평택에 살던 친오빠였다. 올케와 조카들이 교육 문제로 서울로 올라가고 남은 빈방에 들어가서 살기로 했다. 어린 딸은 멋도 모르고 제집인 양 편하게 굴었다. 하지만 공무원 월급을 알뜰살뜰 모아 겨우 장만한 집 한 채를 고스란히 처분해야 했던 그녀의 속은 남편을 향한 원망으로 무너졌다. 그래도 속상함을 남편에게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했다. 아내의 말 한마디에 남편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때는 남편이 너무 미웠죠. 연애결혼을 했고, 결혼생활 내내 믿음직하고 성실한 모습만 보여줬던 사람이라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충격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이만한 사람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 문제는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어요.”


  졸지에 신용불량자가 된 남편은 혼자 서울로 올라가 택시 운전을 시작했고, 틈틈이 생활비를 보내왔다. 남편이 일을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도 고스란히 빚을 갚는 데 써야 했지만, 다행히 연금은 받을 수 있었다. 아쉬움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남은 것을 살펴보니, 모든 것이 감사했다.

 


  “누군가에게 해코지 한 번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조금 억울하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뉴스를 보게 됐죠. 당시는 IMF 외환위기를 지날 때라 길바닥에 나앉은 가족, 부부의 이혼, 심하게는 가장의 자살 등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가정의 문제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저라고 특별히 혜택받은 인생이었겠어요? 그 점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더군요.”
  남편도 아내의 신뢰에 보답했다. 재취업 준비에 골몰하며 신용불량 문제를 해결했고, 결국 한 기관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다행히 능력을 인정받아 차례차례 승진도 했다. 고진감래였다.



탁은나 2



┃  뒤늦은 터닝포인트


'나'보다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이 더 익숙한 그녀에게도 뒤늦은 변화는 찾아왔다. 대학 동창의 소개로 평택의 한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한 것. “내 나이에 무슨…”이라 생각했지만, 친구는 오히려 그녀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 친구가 저더러 '젊은 사람보다 네가 더 낫다'며 한번 지원해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하더군요. '그래,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서류를 준비해서 갔습니다. 다행히 면접을 본 교감선생님이 저를 좋게 보셨는지, 그다음 주부터 바로 출근하게 되었어요. 이후로 3~4년  기술가정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경제활동은 가정에도 보탬이 됐다. 그 돈을 보태 2011년에 서울로 이사했다. 당시 뒤늦은 사춘기를 겪던 딸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즈음 그녀에게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2013년 한국노년인??.

 


  “우리나라가 고령화하고 있으니, 앞으로 노인인권 문제가 더 중요해질 거라는 판단이 들었죠. 저 한 사람의 작은 힘협회 일을 시작했습니다.”

 


  협회를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50대에 가정의 울타리에서 한걸음 나와 사회를 경험한 그녀는 60대에 들어서 진짜 자신만의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쌓아왔던 내면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면서도 타인을 이해하는 나름의 기준도 생겼다.

 


  "60세가 넘어가면 각자의 세계가 생겨요. 예전의 저는 항상 저 자신이 못마땅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잘한다' 칭찬해줘도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했죠. 책을 사더라도 '하루에 두 쪽씩 읽어야지' 하고 계획을 세웠어요. 목표만큼 안 되면 자책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내가 원하는 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걸 느꼈어요. 진짜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한 거죠."

 


  활동 영역도 점차 넓혀갔다. 2015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모니터링단으로 활동해 2년 차를 맞이했다. 올해 들어서는 시민기자로도 활약하게 됐다.



┃  나이 들고나니 보이는 노인인권



탁은나 3



탁은나 씨는 노인인권 문제를 세 가지 단어로 요약했다. '질병' '가난' 그리고 '외로움'이다. 위기에 처한 노인들은 질병과 가난으로 고생한다. 이는 개인의 노력으로만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사회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인 것. 그러나 외로움의 문제만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젊은 시절부터 차근히 준비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년의 외로움을 해결하려면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탁은나 씨는 여기에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살아온 지금의 노인 세대에게는 어쩌면 이것이 더욱 어려운 숙제일지 모른다.

 


  “사회에서 대단한 위치에 있던 사람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면 이내 외로워집니다. 저는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노년의 외로움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02년에 위암 투병을 했는데, 그때 사람들의 연락 한 번도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죠.”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노인인권에 관심을 두면서 노인복지가 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깨닫게 됐다.

 


  “지난해 모니터링 활동을 하면서 노인 일자리에 관한 만족도 조사를 했습니다. 반응이 좋았죠. 일주일에 두세 번이라도 밖에 나와 활동하는 게 노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때는 저 역시 노인 일자리 지원이나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 같은 것이 사회적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노인들의 활동을 돕는 것은 젊은 세대에게도 도움을 주는 일이에요. 조금씩이라도 외부 활동을 하면 건강이 개선되거든요. 그러면 질병 치료에 드는 사회적 비용도 줄일 수 있겠죠. 노인들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집 안에만 있으면 그 사회적 비용을 자녀 세대가 고스란히 지게 됩니다. 그러면 개인에게도 더 큰 부담이 됩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노인인권에 젊은 세대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노인 문제를 개선해간다면, 현재의 20~30대가 노년에 이르면 더 발전한 복지를 누릴 수 있다고.
  현실에서 부딪히고 깊이 고민하며 얻은 깨달음이지만, 그녀는 혹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할까, 몇 번이고 자신의 말을 곱씹었다. 일상을 사색하며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아는 힘이 있다면, 노년의 삶은 청년의 그것보다 더 아름다우리라 생각한 순간이었다. 



 


정라희 님은 전문 인터뷰어로 사람과 산업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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