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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2018.01] 갑질을 만드는 사회, 갑과 을은 누구일까

글 최태섭

 

‘갑질’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적 병폐를 설명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왔다. 정의를 내리자면 “갑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을에게 벌이는 부당한 행위의 총체”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의에서도 느껴지듯이 갑질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동시에 의미한다. 한편으로 이는 한국 사회가 협력적이고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이고 불공평한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다양한 맥락과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부당행위와 폭력을 하나의 개념에 욱여넣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갑질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뜻에 대해 고민해보려 한다.

 

 

 

 

갑질

 

한국에서의 갑
먼저 단어의 결을 따라 생각해보자. 한국 사회에서 갑이란 무엇인가? 갑을 관계는 대체로 계약 관계에서 발생한다. 원칙적으로만 보면 갑과 을은 계약의 양 주체로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기로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평등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계약의 바깥에 실존하는 두 주체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의 갑과 을은 많은 경우 사회적 지위, 권력과 권한, 재산의 소유를 비롯한 다양한 요소들에서 차이를 갖는다.

물론 ‘계약’이라는 행위는 그 기원 자체가 이런 불평등한 주체들 간의 관계에서 서로의 의무와 권한을 제한해 결과적으로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근대적 주권 사상의 기초가 되었던 ‘사회계약론’ 역시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와 개인이라는 작은 존재를 계약이라는 절차를 통해 동등하게 만든 것이다. 국가가 개인을 자의적으로 쥐고 흔들 수 없도록 그 권한을 제한한 것이다. 부당한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들 역시 저 계약이 만들어준 정당성으로부터 출발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했던(때로는 더욱 격렬했던) 국가폭력의 양상들을 떠올려본다면, 이 계약이 제 역할을 온전히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인 간의 계약을 보장하는 국가의 역할이 있다고 하지만 그간 강자가 약자에게 행했던 폭력, 착취, 기만들, 심지어는 그것이 국가의 비호와 묵인 하에서 행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찬가지다. 작금의 부족한 수준의 민주주의나마 달성하게 된 것은 정의로운 국가의 자비심이 아니라,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국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싸운 덕이다.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노동법을 지키라고 몸에 불을 붙이고, 너희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를 내놓으라고 외치다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국가의 목에 방울을 달아왔던 것이다. 

 

이렇게나 다양한 갑질
그렇다면 이번에는 갑질을 세분화하여 살펴보자. 먼저 갑질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키는데 가장 직접적인 ‘영감’을 준 고용의 영역이다. 직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임금 체불이나 부당 해고 같은 문제에서부터 폭언, 폭행, 성폭력과 같은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시작된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외쳤던 요구사항 중에는 “복장 자유”와 “두발 자유”가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일터가 군대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통제되었고, 관리자들의 폭력과 노동법 위반은 일상적이었다.

 

이후 노동자들의 거듭되는 투쟁을 통해 많은 개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더 교묘하고 악랄해진 노동권 침해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작년 11월에 노동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출범한 <직장갑질  119>에는 100일 만에 5,478건의 제보가 쏟아졌다. 관련 법과 제도는 나름 고도화되어 왔지만, 일상의 고용인과 피고용인들의 인식은 제각각이다.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규직 같은 1등급 일자리에서 멀어질수록 이 제각각의 인식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론 한국 재계 서열 1위의 그룹에서 창업자의 유지라는 이유로 ‘무노조 경영’을 관철하기 위해 벌여왔던 행각을 떠올리면 이 이야기도 확신이 없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갑질이라는 단어의 지분은 이런 직접 고용의 관계보다는 외주, 하청, 하도급과 같은 영역에서 기인한 것이 더 크다. ‘사장질’이 아니라 ‘갑질’인 이유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지속적으로 노동 유연성을 강화하려고 노력해왔고, 그것의 가장 주요한 수단은 고용을 줄이고 간접 고용을 통해 일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갑’이라는 존재의 악명이 커진다.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피고용인들에 비해, 상호 간의 계약으로 묶이는 관계에서는 을과 거기에 딸린 병, 정들의 고용안정성은 더 낮아진다. 한국에서 확고한 갑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정부기관과 대기업 정도인데,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솔선수범하여 을들을 괴롭혀왔다. 작게는 일정이나 내용을 수시로 뒤엎어대는 것부터, 과도한 행정적 절차나 서류를 요구하는 일, 비용이나 인건비를 후려치고 전가하는 일 등이 비일비재하다. 대체로 초단기로 유지되는 계약을 갱신하기 위해 갑님의 심기를 살피고 일 외적인 부분에서 로비를 해야 하는 것은 보너스다.

2

갑질은 왜 생길까
고용 및 유사 고용 관계에서 갑질이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힘의 불균형이다. 돈과 힘이 갑에게 몰려있고, 심지어 법도 각종 법률 자원을 동원하기 쉬운 갑에게 더 유리하다. MBC에서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경제사범 재판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약 1,300여 건의 사건 중에 범행 액수가 300억 원을 넘어선 11명은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1) 굳이 정경 유착을 도모하지 않더라도, 특정수준 이상의 돈과 자원을 갖게 된 경제적 주체들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주체이고 원하는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이런 힘의 불균형을 ‘선택과 집중’이라는 이름 하에 오랫동안 성장 전략으로 유지해왔고, 그 결과 이 선택받은 이들은 사회를 지배하는 괴물이 되었다.

 

두 번째 영역은 ‘작은 괴물’들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들이다. 2014년을 기준으로 상위 10%가 전체 개인 소유지의 64.7%를, 법인의 1%가 전체 법인 소유지의 75.2%를 소유하고 있다.(2) 이렇게 집중되는 이유는 오늘날 건물주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건물’이기 때문이다. 임금 소득을 통해 건물주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다른 부동산을 사는 투기가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공간은 인간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부에 의해 독과점 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거와 공간의 문제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유하는 사람 중심으로, 그리고 부동산 매매를 한국 사회의 유일무이한 부의 축적 방식으로 만들도록 방조한 여파는 거대하다. 2009년 6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용산참사는 물론이고, 최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사태가 증거하는 바다. 건물주들은 임대주택이나 대학교 기숙사의 건설을 반대하고, 장사가 잘되는 세입자를 내쫓고, 건물을 주식이라도 되는 양 사고 팔며 시세 차익을 노린다. 한국의 민간경제가 건물주들에게 볼모로 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소비자의 갑질이 있다. 소비자는 오늘날 힘없는 사람이 갑의 위치에 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리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돈을 내는 사람에게는 평등하다는 것도 명목상의 이야기다. 힘없는 이들은 소비시장에서도 가난세를 지불한다. 대기업일수록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 정보와 가격을 불균등하게 통제하는 힘이 생긴다. 때문에 ‘호구’와 ‘블랙컨슈머’는 동전의 양면이고, 자신을 무시하고 속이려 했다는 강박적 의심이 소비자의 갑질을 만든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마저도 결국 을들 간의 싸움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콜센터는 거의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주화하는 부서다. 결국 그 회사 사람도 아닌 이에게 모욕과 쌍욕을 퍼붓고 나면, 진짜 갑들은 만신창이가 된 콜센터 외주업체를 갈아치우면 그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갑질은 특정인들에게 지나치게 몰려있는 돈과 권력을 배경으로 한다. 때문에 갑질하는 자들의 죄를 물어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갑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이 쏠림을 막고, 또 해소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갑님들이 착해지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02

 

최태섭 님은 <잉여사회>, <모서리에서의 사유>를 쓴 문화평론가입니다.

 

(1)"[새로고침] 300억 이상 고위직은 집행유예? MBC, 박영회 기자.2018. 2. 6.

(2)""정권은 유한하지만 부동산은 영원하다"...건물주의 나라,", 경향신문, 류인하 기자, 2018. 1. 20. 

 

화면해설.

이 글에는 커다란 사람이 움츠러들어 작아진 사람에게 팔을 휘두르며 소리치고 있는 그림과 몸이 산산히 부서져나가 좌절하는 듯 주저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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