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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속의 칼 [2018.01] 벌레의 탄생 ○○충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인권 편집부

 

혐오가 늘 흉기와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맘충’부터 ‘틀딱충’까지, 사람을 벌레로 만드는 곳은 랜선 위를 서슴없이 가로지르는 점잖은 논리들이다.

“내가 당해 봐서 아는데”, “모두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건 사실이거든”.

 말속의 칼 일러스터

랜선 밖으로 나온 벌레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욕설과 함께 민폐를 끼치는 미성년자들은 ‘급식충’으로 불린다. 식당이나 백화점에서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을 방치하면 ‘맘충’이 된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노인은 틀니를 딱딱거린다고 ‘틀딱충’이다. 별로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루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설명충’이며, 이렇게 ‘○○충’의 유래와 사회적 문제를 짚는 글 자체가 이미 누군가에게는 ‘진지충’이다.


‘○○충’은 지역혐오와 수구보수 이데올로기의 진원지였던 ‘일간베스트저장소’ 사이트 이용자들을 ‘일베충’이라 부르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설명충’이나 ‘진지충’, 모든 글에 ‘좋아요’를 날리는 ‘따봉충’까지는 젊은 세대의 기발한 신조어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역 균형·기회 균등 선발 전형으로 입학한 대학생들을 ‘지균충’, ‘기균충’이라 부르고 성소수자가 ‘X꼬충’으로 비하당하기에 이르면 다만 인터넷 향유층의 독특한 언어 습관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혐오의 민낯, 이제는 직시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일부 서비스 업체들이 아이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이 늘어나면서 ‘맘충’ 문제는 이미 인터넷 뒷담화를 넘어섰다. 지하철 노인 무임 혜택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져간다. 자리 타박하는 노인이나 자기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 엄마들을 보고 불쾌해하는 수준을 넘어 집단 전체를 상대로 노골적인 혐오가 가시화된 셈이다.

 

익명의 인터넷 공간에서 한두 사람의 경험담이 확산되기 시작하고, 이에 동조하는 제2, 제3의 이용자가 거들면, 아무런 민폐나 ‘진상’을 부리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도매급으로 ‘벌레’가 된다. “내가 당해봐서 아는데”, “노인들 전부가 그렇지 않은 건 저도 알죠”, “일부 몰지각한 엄마들이 꼭 있다는 거죠”,…. 여기에 초고속 인터넷 환경이 갖춰지면서 혐오의 나비효과는 현실이 된다.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흉기를 들어야 혐오인 것은 아니다. 혐오의 진원지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과 같은 점잖은 논리적 구조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면서 결국 모두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역설. 점잖은 민낯의 혐오가 가장 위험한 이유다.

 

‘파파충’, ‘재벌충’은 없다?
‘○○충’ 표현 뒤에는 ‘극혐’이 따라붙는다. 극도로 혐오한다는 의미다. 사람을 벌레에 견줄 만큼 몰상식한 사건이 얼마나 늘었는지 통계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벌레만큼 혐오하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확연하게 늘어났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혐오의 확산은 ‘헬조선’, ‘지옥불반도’처럼 자조를 부를만큼 팍팍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구직난에 허덕이고 일상적으로 갑질에 시달리면서 모멸감을 겪다 보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여유를 갖기 쉽지 않다. 갑질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또 다른 갑질의 주동자가 되는 벼랑 끝에 서게 되는 것처럼 혐오와 같은 극단적 감정들은 더욱 확산되기 마련이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충’이 출현하는 이 신(新) 곤충류의 시대에도 ‘재벌충’이나 ‘파파충’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비하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충’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약자에 해당하는 집단들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분명히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거나 ‘민폐를 안 끼치면 되는 것 아니냐’는 항변이 무색해지는 지점이다. 혐오는 가장 약한 지반을 뚫고 올라오는 법이다.02

 

화면해설.

이 글에는 유모차를 중심으로 돈, 다이아반지, 스마트폰, 메가폰 등이 그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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