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 > 줌인2 <특집> > 현장의 목소리 선수 인권을 말하다
‘젊은 빙상인 연대’ 여준형 대표

줌인2 <특집> [2019.01] 현장의 목소리 선수 인권을 말하다
‘젊은 빙상인 연대’ 여준형 대표

글 김희정, 사진 봉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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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체육계의 악행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엘리트 체육에 대한 여론도 들끓고 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막한 지 1년,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스포츠 경쟁력을 상징했던 엘리트 체육의 위상이 급락했다. 메달 뒤에 가려져 있던 곪은 상처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트 체육이 성폭력 및 폭력 등 각종 비위의 온상으로 지적되면서 체육계는 소용돌이 속이다. 대통령까지 나서 엘리트 체육에 대한 전면 재고를 주문한 상태다. 아울러 이제 스포츠 강국보다는 스포츠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거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를 지내고 현재 빙상계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빙상인 연대’ 여준형 대표를 만나 체육계의 실태에 대해 들어봤다.

 

인권 반갑습니다. 먼저 ‘젊은 빙상인 연대’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여준형 최근 체육계에 여러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많은 선수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고, 피해 받은 선수들을 돕기 위해 이제라도 나서게 됐습니다. 2018년 9월에 정식 출범했고 빙상계 선수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문제점을 찾기 위해 열심히 발로 뛰고 있습니다.

 

인권 ‘엘리트 체육’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분들에게 그 뜻을 설명해주시겠어요?

여준형 엘리트 체육은 국내 운동선수들에게 행해지는 전형적인 선수 육성 방법을 일컫는 말로, 1960년대 중반 태릉선수촌이 생기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에 재능 있는 선수들을 어릴 때부터 발굴해 초·중·고·대학교 과정에 이르기까지 강도 높은 운동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국내 체육계 시스템을 말합니다.

 

인권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폭력 및 기타 문제로 고통받고 있나요?

여준형 과거 밥 먹듯 폭력을 행사하던 수준보다야 줄었지만, 여전히 폭력은 행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리적인 폭행뿐 아니라 언어 폭행도 포함됩니다. 통계 자료가 없어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20~30% 이상의 선수들은 운동을 포기하고 다른 분야로 옮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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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현재 빙상계도 시끄러운 실정인데요. 사제 간의 폭력, 조직의 사유화 등 곪았던 문제가 드러나면서 큰 질타를 받고 있는 데 대해 어떤 심경이신가요.

여준형 일단 빙상인으로서 굉장히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일찍 밝혀졌어야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선수 인권이 위협받는 많은 문제들이 관행처럼 이어져왔고, 이에 대해 선수들이 호소해봤자 연맹은 사건을 덮거나 감추기 급급했습니다. 그동안 선수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개혁이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인권 대표님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조재범 코치가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이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체육계 전반에 얽힌 폐해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까요?

여준형 조재범 코치는 잘못을 했고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주목할 점은 조재범 코치가 대한빙상경기연맹에 소속된 국가대표팀 코치였다는 것입니다. 비단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사안이 아닌 거죠. 조재범 코치뿐만 아니라 연맹 책임자들도 무거운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징계를 받은 이후도 문제겠죠. 기존에는 가해자들이 다시 체육계 현장으로 쉽게 돌아올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당연히 보복이 두려운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쉽게 밝히지 못했던 겁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단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폭넓게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권 현재 많은 언론인이 성폭력과 폭력 등으로 얼룩진 체육계의 개혁을 위해 엘리트 체육을 손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체육계는 공들여 쌓은 국내 스포츠 경쟁력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여준형 체육계는 지금 변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동안 성적 지상주의에 기반을 둔 국가 스포츠 정책을 전반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엘리트 체육은 결과 지상주의였습니다. 이제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체육계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모른 체하고 싶은 걸 수도 있겠죠. 그래도 변화는 필요합니다. 단 한 명의 인권이라도 누군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희생될 순 없습니다. 엘리트 체육은 50~60년 동안 변함없이 흘러왔습니다. 이제 변할 때가 됐습니다.

 

인권 성폭력·폭력이 끊임없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엘리트 체육의 구조적 문제 중 감독과 선수의 주종 관계에 대해 설명 바랍니다.

여준형 외국의 경우 지도자들의 역할이 세분화돼 있습니다. 스케이트 코치는 스케이트만 가르치고 웨이트, 심리, 트레이너 등 기타 영역은 다른 지도자들이 담당합니다. 따라서 코치의 권한이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감독에게 막강한 권리가 독점돼 있어요. 코치의 말을 안 들을 수 없는 구조인 거죠. 선수들의 자기 선택권이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지도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선수들 개개인이 힘들어하는 문제를 들여다볼 사람 또한 한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는 선수들이 여러 지도자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구조가 돼야 하며, 결정 또한 본인의 몫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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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학교 체육이 원활하게 작동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학교 체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여준형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모든 문제는 학교 체육을 왜곡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본래 엘리트 체육은 훌륭한 체육인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초·중·고등학생 선수들이 운동을 진학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었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고, 결과만 좋으면 병역 특례나 체육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선수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학부모는 좋은 지도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도자는 진학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암묵적으로 체벌을 인정하게 됐을 겁니다. 그렇게 체벌의 강도는 점점 더 높아졌고, 이윽고 또 다른 문제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인권 그동안 한국 스포츠가 엘리트 체육과 국위선양에만 집중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스포츠 강국이 아닌 스포츠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요. 스포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여준형 결국 체육계는 이 부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직업선수를 육성한다는 명목 아래 엘리트 체육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스포츠 저변 확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렸을 때부터 운동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학업과 교우관계도 충실히 이행해야겠죠. 그렇게 해서 훗날 선수 생활을 은퇴하더라도 운동 분야만이 아닌 다양한 분야로 직업생활을 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마련이 필요합니다.

 

인권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체육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꿋꿋이 참아내는 원동력이 있을까요? 어떤 심정으로 견뎌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여준형 아마도 체육의 가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희는 어렸을 때부터 ‘포기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달려온 만큼 끝까지 자신의 목표를 향해 가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긍정적인 체육인들이 많이 배출될수록 우리 사회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인권 마지막으로 지금 이 시간까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선수와 지도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여준형 어려운 환경에서도 굳건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준 선수와 선의의 지도자들이 피해를 받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입니다. 또한 갖가지 미래의 변화를 예상하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육계는 변화해야 합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부디 많은 선수와 지도자들이 한목소리를 내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개선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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