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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음 [2019.01] 3·1운동 100주년 유관순의 삶과 인권

글 김형목

 

지금까지 유관순 연구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3·1운동의 아이콘으로서 자리매김한 것 또한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있다. 이제 유관순은 3·1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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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인 열정은
잠재된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충청지역 여성교육은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여선교사인 샤프 여사(Alice Hammond Sharp)에 의해 신호탄을 알렸다. 그는 감리교 목사 로버트아더 사프(Robert Arthur Sharp)와 결혼해 사부인(史婦人, 史愛理施)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남편은 결혼한 지 2년이 조금 지난 1906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사부인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미국으로 귀국해 2년 후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돌아왔다.

여성교육에 관심을 가진 그녀는 각 교회를 순회 방문하면서 특히 여아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사부인은 유예도와 유관순을 자신이 운영하는 영명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약 1년간 수학한 후 사부인은 이들에게 서울로 유학할 것을 권유하고 이를 직접 주선했다.

번화한 서울 거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이화학당 2학년에 편입한 유관순은 중등교육 수혜를 받을 수 있었다.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며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규칙에 따라 아침 7시에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저녁 9시에 취침할 때까지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학생들은 식탁 주위에 둘러앉아 교사의 인도로 기도를 마친 후 음식을 차렸다. 심지어 10월 말에는 김장 방학을 하는 등 자신들이 먹을 김장을 스스로 마련했다.

유관순은 2학년에 편입해 3학년 때부터는 산술 등을 배웠다. 주요 교과목은 일본어·조선어·한문·산술·찬송가·도화(미술)·재봉·수예·체조 등이었다. 음악시간에는 생소한 합창과 체육시간에는 농구·배구·테니스 등을 접했다. 처음에는 생소했으나 스스로 적극 대응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토요일에는 학교 근처에 있는 정동교회의 주일 예배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기숙사 대청소와 빨래·다듬이질·바느질 등으로 분주한 나날이었다. 동료들과 어울려 신앙심을 키우고 틈나는 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기도에도 참여했다. 이처럼 유관순의 깊은 신앙심은 훗날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학생들은 이화학당을 이화동산이라고 부르는 등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향으로 인식했다. 자각을 통한 민족의식 형성은 시대적인 소명을 다하는 에너지원으로 점차 자리매김했다.

 

아우내 만세운동의 밀알이 되다

갑작스러운 광무황제 서거는 온 국민에게 나라 잃은 슬픔에 젖게 했다. 와중에 광무황제 ‘독살설’은 급속하게 확산돼 민족적인 울분으로 팽배했다. 1919년 1월 천도교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을 통해 독립운동 추진을 결정했다. 독립운동 원칙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이었다. 이어 기독교계와 불교계와 연합전선 구축에 돌입했다. 유림 측과 연대는 무산됐다. 종교계와 학생들 연대에 의한 3·1운동은 착착 진행됐다.

드디어 3월 1일 아침이 밝았다. 서울은 전국에서 몰려온 행렬로 넘쳐났다. 오후 1시를 전후로 탑골공원에는 학생 수천 명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팔각정 계단에서 장엄한 독립선언서를 학생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시민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3·1운동은 2천만 명이 하나 된 역사적인 외침이자 절규에 가까운 함성이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리 동포가 있는 곳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유관순은 동료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결의를 다졌다. 기도를 핑계로 ‘결사대’를 조직했고 3월 1일 만세운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만류하는 프라이교장 등을 뿌리치고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3월 2일 학생 대표들은 이화학당을 찾아와 3월 5일 학생단 시위 참여를 권고했다.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도 참여했다. 만세시위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임시 휴교령도 내려졌다. 학교에서는 기숙사에 남아 있는 학생들에게 귀향을 권유해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우내에 도착한 유관순은 분위기를 살폈다. 동지 규합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앞장섰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고 천안·안성·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로 돌아다녔다. 음력 3월 1일에 총궐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해 약속을 받아냈다.

드디어 거사일 하루 전인 2월 그믐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횃불이 올랐다. 이는 내일의 거사 신호탄이자 동지들과 연락 신호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약 3,000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였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시위 군중은 아우내 거리를 행진했다.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운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댔다. 무자비한 진압으로 유관순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사망하고 죄 없는 주민 30여 명이 부상당했다.

 

옥중에서도 독립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현장에서 체포된 유관순은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겪었다. 일본헌병은 취조 과정에서 멸시와 성희롱을 일삼았다.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결국 유관순은 천안의 일본헌병대를 거쳐 공주재판소로 넘겨졌다.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유중무(유관순의 숙부)·조인원(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3명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인명을 살상하지 않은 시위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사례는 많지 않다. 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법정 투쟁을 벌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수형자 기록표에는 붉은 벽돌과 쇠창살을 등지고 병색이 완연하고 부은 정면과 오른쪽 옆모습 사진이 남아 있다. 이글거리는 눈빛은 불의에 전혀 굴복하지 않는 당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감옥의 높은 담과 쇠창살, 비인간적인 학대도 유관순의 자유와 독립을 향한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녀는 수시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다른 수감자들도 이에 호응했다. 그때마다 간수에게 끌려 나가 발길질과 모진 고문을 받기 다반사였다.

이례적으로 선교사 스코필드(F. W. Scofield) 박사는 어느 날 여자 감방 8호실을 방문했다. 여기에는 유관순을 비롯해 권애라·신관빈·심명화와 수원기생 김향화 등이 수감돼 있었다. 이때 유관순과도 대면하게 됐고, 다시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됐다.

1920년 3월 1일 8호실을 시작으로 만세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주동자로 지명된 유관순은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자 옥중 투쟁은 다시 계속됐다. 간수들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등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마치 자유의 화신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과 체포 당시 입었던 상처가 재발됐다. 그토록 목 놓아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못 본 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에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했다. 호롱불이 꺼지듯 차디찬 감방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고 말았다. 옥중 생활 1년 반의 세월이 흘러 나이 19세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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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①여선교사 샤프 여사 / ②3·1운동 공로자 스코필드 박사 환영회 / ③유관순 수형자 기록표

 

순국으로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다

유관순 유해는 10월 12일에야 이화학당에 인도됐다. 부모님은 사망하고 오빠, 친척 등도 감옥을 가거나 피신을 하는 등 가정은 풍비박산된 상황이었다.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을 만큼 외로운 고혼이 됐다. 학교 당국자들은 유관순이 진정한 ‘독립운동 화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단 옷감으로 수의를 만들어 입히는 동시에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가슴 위에 덮고 입관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스승과 동문들에 의해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유해는 정동교회 마당을 벗어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마침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해는 유실됐다. 고혼(孤魂)이라도 편히 쉬게 하고자 1989년 10월 12일 아우내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로 봉안했다.

이 시대에 접어들면서 시대 상황과 가치관의 변화로 3·1절을 공휴일로 생각하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하지만 100년 전 이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선 소녀 유관순이 있었다. 선조들은 엄혹하고 살벌한 일제강점기에도 자유와 광복을 향한 고난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의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독립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굳건한 밑거름임을 되새기도록 하자.

 

 

김형목 님은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으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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