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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말하다 [2019.02] 모두가 평등한 세상 위해 힘썼던 사람 노회찬

글 석수영 / 사진 봉재석, 노회찬재단

 

노회찬재단 조승수 사무총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노회찬재단의 작은 공간은 책으로 가득했다. 빛바랜 것부터 연식이 얼마 안 된 책까지 사면이 빽빽이 둘러싸여 있었다. 노회찬재단 조승수 사무총장은 모두 그가 남기고 간 것이라고 소개하며 책을 통해 노회찬의 삶을 되짚어보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노회찬의 정신을 잇기 위해 설립된 재단, 그곳에서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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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노회찬재단 조승수 사무총장

 

용접공으로 일한 경험
진보정당 활동으로 이어져

조승수 사무총장은 노동운동을 하던 중 1992년 노회찬을 만났다. 30년 가까이 끈끈한 인연을 이어온 그가 곁에서 지켜본 노회찬은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마주했을 때 그는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더 익숙했다. 대외활동에서 달변가에 유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던 그를 떠올려 봤을 때, 그것은 의외의 평가였다.

“오랜 세월 함께 했고 나이가 6살이나 많은데도 한번도 제게 반말을 한 적이 없어요. 자신을 낮추며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자세가 노회찬을 수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 노동운동가이자 국회의원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그를 노동운동가로 이끈 것은 시대였다. 학창시절 그는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적으로 대통령의 길을 걷는 박정희를 보며 사회 불합리를 경험했다. 무엇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정치 운동만으로는 세상을 바뀌기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노동자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힘이 모여야 ‘강자를 위한 세상’에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으로 바뀔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찌감치 노동운동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려면 노동자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노회찬은 대학 4학년이었던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등록해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한다. 그리고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 하청공장에서 3년간 일하며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과 부당함을 경험한다.

“노동자로 살았던 경험은 그를 진보정당 운동에 온 힘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려면 제도적인 변화가 반드시 필요했죠. 그래서 그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입법 활동을 하고자 정당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품은 뜻이 있었기에 노회찬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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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사회적 약자 위해 힘써

노회찬은 인공지능보다 더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평소 각종 책과 신문, 온라인 자료들을 섭렵하며 그는 지금의 사회 구조를 살피고 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힘써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그의 궁극적인 바람은 ‘전 국민이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것은 노동에 지친 삶이 아닌 누구나 여유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합리적인 세상을 꿈꾼다는 의미였다.

그는 제17대, 19대,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오랜 세월 동안 쌓아놓은 다양한 정보들을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을 지키는 데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활동으로 호주제 폐지 법안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안을 통과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 노회찬은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를 위해 연대활동에 적극 나섰다. 조 사무총장은 단식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을 위해 싸웠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2007년 이랜드 노동자 강제 연행,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 2012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철탑 고공농성 등 수많은 투쟁 현장을 찾아가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집회에 참여했다.

“2011년 7월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면서 심상정 의원과 함께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죽염과 물에 의존해 농성을 이어갔기 때문에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갔죠. 주변에서 건강 악화를 걱정하며 만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단식투쟁은 30일간 이어졌고 결국 병원에 실려 가게 됐어요. 노회찬은 단식으로밖에 부당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나라,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여러 문제들부터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어려움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 부당함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그는 느리게나마 사회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의 앞에서 차별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줘

2016년 10월 광화문에서 일어난 촛불집회는 노회찬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을 안겨줬다. 그는 촛불이 세상을 바꾸는 초석을 마련했다며 우리 사회는 이제 ‘촛불집회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 문제를 국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기를 요구했고 이는 대통령 탄핵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촛불집회가 우리 사회에 큰 과제를 안겨줬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공정을 공정으로, 불평등을 평등으로 바꾸는 계기라고 여겼죠. 그러기 위해서는 강자에게 관대했던 사법부의 관행부터 깨야 한다고 했습니다. 죄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있어야 사회가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삼성 X파일 사건’은 이 같은 노회찬의 신념을 가장 잘 보여준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불법 도청 녹음 테이프가 공개된다. 그 속에는 삼성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렸다는 증거가 담겨 있었다. 노회찬은 뇌물을 받은 검사 7명의 실명을 과감히 대중에 공개한다. 그리고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됐다. 통신비밀보호법을 근거로 재판한 결과 그는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국회의원 자격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2심에서는 무죄를 판결 받는다. 권력자들의 실명을 공개하는 순간 앞으로 고단한 일들을 겪을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명확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의 앞에서 차별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기에 용기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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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노회찬의 책들

 

노회찬재단,
못다 이룬 노회찬의 꿈 이루고자 노력

노회찬은 말을 곧 행동으로, 생각을 곧 실천으로 보여준 우리 시대의 양심적 정치가였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노회찬이 2018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3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빈소를 찾아와 평생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를 대변해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었다.

“빈소에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했던 말은 ‘이렇게 노회찬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를 마련해 주길 바랐는데 갑자기 떠나 가슴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때 노회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과 함께 결심했습니다. 그의 정신을 잇는 재단을 설립해야겠다고.”

인터뷰가 끝나고 조 사무총장은 재단에 진열된 노회찬의 사진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사진을 보는 그의 얼굴에 어떤 다부진 의지가 스치고 있었다. 인권 보호를 위해 살아온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가 못다 이룬 사회 정의를 달성시키겠다는 의지 말이다. 올해 1월에 설립된 노회찬재단은 앞으로 노회찬이 남긴 각종 자료와 어록을 정리해 출판하고 제2, 제3의 노회찬을 길러내는 정치학교와 시민학교를 운영해나가려고 한다. 노회찬재단에서 그와의 동행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조승수 사무총장은 제17대, 18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노회찬과 함께 30년 가까이 노동 운동과 진보정당 활동을 해왔습니다.

노회찬재단
• 주 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 성우빌딩 501호
• 문 의 : 02-713-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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