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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생각 [2019.02] 안희정 성폭력 판결의 의미

글 차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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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하는 생존자(성폭력 피해자의 대안 용어)의 ‘미투(Me, too)’ 말하기가 이어진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안희정 씨가 유력 대선주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여성 노동자가 ‘직장 내 성폭력’ 또는 ‘위력 성폭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11개월 만의 유죄 판결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 씨는 2018년 4월 11일 재판에 넘겨졌다. 충남도청의 수행비서와 정무비서로 일하던 여성에게 업무상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을 비롯해 총 10건의 성폭력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였다. 2018년 8월 14일 검사의 공소를 심리한 서울서부지방법원이 전부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 ‘위력은 존재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는 이 법원의 판단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

검사는 항소했고 2019년 2월 1일, 2심인 서울고등법원이 안희정 씨에게 9건의 성폭력을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다. 피해 여성이 방송으로 자신의 피해를 밝힌 2018년 3월 5일로부터 11개월 만이었다.

 

1심 무죄 판결, 무엇이 문제였나

1심 법원은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위력 성폭력)’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① 위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② 그 위력이 행사돼야 하고, ③ 행사된 위력과 간음·추행 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돼야 하며, ④ 그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과가 발생해야 한다’는 판단의 기준을 제시했다(검사 항소 이유가 지적하듯이 이 기준은 대법원이 일관되게 세운 기준과는 다른 것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2018년 한국인권보고서는 이 사건 1심 무죄 판결을 걸림돌 판결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판결은 업무상 위력 간음·추행죄의 구성 요건으로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를 구분해 ‘위력은 존재하나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판단을 함으로써, 직장 내 업무 감독자가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성폭력 행위를 하는 경우 피해자가 처하게 되는 전후 상황과 맥락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성폭력에서 업무상 위력이 작동하는 관계에 대한 사회 관념이나 일반인의 경험칙과 동떨어진 판단을 했다. 또한 이 판결은 법원의 성폭력 사건 심리 시 ‘피해자에 대한 성인지 감수성적 고려’가 필요하다고 선언하면서도, 개별 공소 사실에 관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에는 성인지 감수성을 기초로 하지 않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통념과 편견을 기반으로 판단했다.”

검사는 1심 무죄 판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 오인, 법리 오해, 심리 미진의 이유를 들어 항소했다. 첫째, 1심은 피고인의 범행(공소사실)이 물적·인적 증거로 뒷받침되는 피해자 진술, 피해 호소를 들은 참고인 진술 등 여러 증거에 의해 인정되는 데도 합리적 이유와 근거 없이 배척했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동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하지만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가 사적 관계라고 볼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데도 성관계가 합의하에 이뤄질 사정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심리하지 않았다. 특히 1심은 개별 사건 이후 피해자가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에 종사한 것을 두고 성폭력 피해자의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납득하기 어렵다며 편견에 근거한 사실 인정, 충분한 심리 없이 추측에 근거한 사실 인정을 했다(사실 오인).

둘째, 1심 법원이 사건에 적용한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추행죄’의 구성 요건이 대법원의 판례와는 달라서 법리 오해가 있다. 판단 기준을 매우 좁게 설정해서 사실상 강간·강제추행죄와 구분할 수 없도록 하고, 지위나 권세와 같은 무형적 위력을 이용하면 충분히 범죄가 성립함에도 1심 법원은 무형적 위력도 유형적으로 행사돼야 하는 것으로 판단해서 위력의 범위를 축소해 보고 있다(법리 오해).

셋째, 1심 법원이 형사소송법의 전문심리위원제도나 ‘성폭력범죄 처벌 특례법’의 전문가 의견 조회 제도를 그 취지에 맞춰 진행하지 못하고 부적절하게 판단에 사용했다는 점, 검사의 비공개 재판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개 재판으로 진행해 피해자에게 심각한 2차 피해를 입힌 점, 형사소송법규나 ‘성폭력범죄 등 사건의 심리·재판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규칙’에 위반해 피해자가 모욕적이고 반복적인 반대신문을 감내하도록 해 적절한 소송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점도 검사는 항소 이유로 삼았다(심리 미진).

 

2심 유죄 판결, 어떻게 달라졌나

2심 법원은 검사의 항소 이유를 받아들이고 1심 판결을 파기하면서(10건 중 9건 유죄 인정), 대법원이 성폭력 사건 심리에서 그동안 기준으로 세웠던 여러 법리를 재확인했다. 1심 법원이 위력 성폭력의 성립 범위를 좁히면서 새롭게 제시한 판단 기준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형법 제303조에서 말하는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지(직장에서 실질적으로 업무나 고용 관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 포함), 위력을 구성 요건으로 하는 성폭력범죄에서의 위력의 의미(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으로서, 유무형의 힘을 모두 포함하며 폭행 또는 협박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 업무상 위력추행죄에서 위력과 추행의 의미, 강제추행죄에서의 폭행의 의미(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가 있는 이상 그 힘의 대소강약 불문), 강제추행죄에서의 추행의 의미 등 성폭력범죄의 구성 요건에 관한 대법원의 법리를 다시 확인하며 이 사건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 기준에 관해서도 지금까지 대법원이 일관되게 세운 기준을 재확인했다.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 사건이 발생한 맥락과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는 법리는 1심 법원도 인용한 것이지만, 1심법원과는 달리 개별 공소사실 판단에서 이러한 기준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하게 적용됐다.

특히 1심 판결이 선고된 이후 2018년 10월에 선고된 대법원 판결 중 “피고인 진술이 경험칙상 합리성이 없고 그 자체로 모순돼 믿을 수 없는 경우 피고인 진술이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직접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거나 직접 증거인 피해자 진술과 결합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간접 정황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을 사건 판단의 법리로 제시했다.

이와 같은 법리를 전제로 2심 법원은, 1심이 하지 않았던 피고인 신문을 거치고 피고인 안희정의 진술을 판단해 1심 판단과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2심의 심리 과정에서 피고인이 한 사과를 번복하거나, 피고인이 피해자와 어떤 관계였는지 진술이 계속 바뀐다는 점, 연인 관계였다는 피고인 주장과 모순되는 피고인 스스로의 진술, 피고인의 진술과 다른 물증, 피고인의 진술과 부합하지 않는 제3자 증언을 심리해서 피고인의 진술 가치를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인정하는 간접 자료로 활용했다.

2심 법원은 3년 6개월 징역형 실형의 양형 이유를 밝히면서 피해자가 입은 2차 피해에 관하여 명확하게 짚기도 했다. “피해 사실을 밝히는 과정은 물론 그 이후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도 근거 없는 내용들이 유포돼 추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고 판시하고,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을 계속 부인해서 피해자가 수사기관, 1심 법정, 2심 법정에까지 출석해서 자신이 입은 피해 사실을 거듭 회상하고 진술해야 했다는 점을 피고인에게 불리한 정상으로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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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판결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1심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고 사법 구제를 받기 위해 나선 피해자가 법정에서, 언론에서, 공론의 장을 가장한 인터넷 공간에서 어떻게 2차 피해를 받는지 실시간으로 목격해야 했다. 검사의 비공개 재판 의견을 무시한 채 심리하고 위력 성폭력의 성립 범위를 좁힌 1심 판결은 수십 년간 쌓아온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와 입법, 사법의 원칙들이 빛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안희정 사건은 2심을 거치면서 우리가 성폭력 사건에서 전형적으로 접하게 되는 강간에 관한 통념과 잘못된 편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2심 판결은 성폭력 사건의 재판에서 피해자와 피고인의 진술을 각각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직장 내 성폭력’ 사건에 적용되는 형사법의 ‘위력 성폭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성적 침해가 성폭력임에도 처벌할 수 없고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노동의 현장에서도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일터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의 인식과 행동 변화가 제일 먼저 이뤄져야 한다. 법정 안이든, 밖이든 다시 ‘미투 운동’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차혜령 님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일하는 변호사이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장을 지향하는 ‘공감’에서 주로 젠더에 기반한 폭력이나 차별 등의 여성 인권 사건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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