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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심각한 문제일까

줌인1 <특집> [2019.03] 일상화된 혐오표현
어째서 심각한 문제일까

글 정덕현

 

최근 들어 ‘혐오’라는 표현은 사회문제가 지목될 때마다 어디서든 발견되는 일상어가 된 느낌이다. 표현이 일상화될수록 그 강도는 점점 세지기 마련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또 그 문제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이며, 해결책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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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화된 혐오표현이 야기하는 것들

2013년 장동민과 유세윤, 유상무가 팟캐스트에서 “여자들은 멍청해서 머리가 남자들보다 안 된다” 같은 여성혐오 표현은 물론 군대에서 후임을 괴롭혔던 에피소드, 심지어 삼풍백화점 생존자나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을 마치 굉장한 무용담이나 되는 듯 쏟아냈다. 그것은 특정 소수자 혹은 약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혐오표현이었지만, 그것이 문제로 불거진 건 2년이나 지난 2015년이었다. MBC <무한도전>에서 새 멤버를 뽑는 일종의 오디션을 치르게 되면서 일종의 검증에 들어가게 됐고 거기서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물론 일간베스트 같은 게시판의 혐오표현이 늘 논란이 되고 있었지만 연예계는 상대적으로 이런 혐오표현이 묻히거나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막상 장동민과 유세윤, 유상무의 이른바 ‘옹달샘 사태’가 불거져 나오면서 연예계 곳곳에서 일상화된 혐오표현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국 최초로 동성 결혼식을 올렸던 김조광수, 김승환 부부는 자신들을 향한 성소수자 혐오발언을 한 사람들에게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은 칼럼에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과연 혐오표현들은 어느 정도의 수위로 회자되고 있을까. 최근 벌어진 버닝썬 게이트에서 정준영의 압수된 핸드폰에서 그가 지인들과 대화방을 통해 나눈 대화를 보면 이들의 심각한 여성혐오가 얼마나 일상화돼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이들의 태도는 결국 그 혐오표현이 행동으로 그대로 이어졌다는 걸 드러난 사건의 전말이 보여줬다.

혐오표현은 이처럼 말 몇 마디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일상화되면 범죄적 행위조차 둔감하게 만들 수 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혐오차별 대응 특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각도로 혐오와 혐오표현의 문제에 대응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혐오표현이란 무엇일까

‘싫어하고 미워함’이란 뜻을 가진 혐오란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는 광범위하다. 즉 단지 싫어하고 미워하는 표현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혐오표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의가 필요해진다.

혐오표현은 ‘Hate Speech’의 번역어라고 볼 수 있는데 「말이 칼이 될 때」의 저자 홍성수가 국제법에 근거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을 그는 혐오표현이라고 했다.

여기서 방점이 찍히는 건 ‘소수자’라는 단어다. 혐오표현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소수자에게 행해졌을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혐오표현이 사회적 문제로 지목됐던 인물군들은 주로 여성,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난민 등이었다.

혐오표현 문제가 지목될 때마다 그 반대 논리로 ‘표현의 자유’가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서구사회에서는 그 표현이 심각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에서 예외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것은 편견이 차별로 이어지고 그 차별이 심각한 증오범죄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혐오표현에 둔감했고, 그로 인해 야기된 폭력들에 노출돼 있었는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을 ‘김치녀’라 부르고 성소수자를 ‘똥꼬충’이라고 부르며 육아 여성을 ‘맘충’이라 부르는 식의 혐오표현들은 이제 인터넷창을 열면 어디서든 쉽게 찾아진다. 온라인에서 10명 중 9명이 혐오표현을 경험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혐오와 차별은 심각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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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문화와 겹쳐져 야기된 혐오표현의 일상화

혐오표현이 특정 소수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속에 혐오의 의미가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는 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제 ‘극혐’이라는 말을 어디에서나 보고 쓰는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쓰기 편하기 때문에 ‘축약’의 특징을 갖는 인터넷신조어 문화와 이른바 ‘혐(嫌) 문화’가 겹쳐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혐오’의 단순한 줄임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혐’으로 줄여진 이 접사는 여러 단어들의 앞뒤로 달라붙어 다양하게 활용되는 인터넷 일상용어가 돼버렸다. ‘혐한’, ‘혐일’처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혐주의(혐오스러운 장면이 있으니 주의)’, ‘극혐(극도로 혐오함)’, ‘혐짤(혐오스러운 짤방)’처럼 단어들이 합쳐져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인터넷상에서 혐오스러운 사람의 이름이나 지칭에 앞 글자를 떼고 ‘혐’을 붙여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혐줌마(혐+아줌마)’, ‘혐저씨(혐+아저씨)’, ‘혐산당(혐+공산당)’ 같은 것들이다.

이런 ‘혐 문화’를 방송은 마치 그것이 트렌디함을 드러내는 일인 것처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곤 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막을 통해 ‘극혐’ 같은 표현을 발견하는 건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됐다. 인터넷에서 좀 더 재밌고 간편하며 임팩트 있게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극혐’ 같은 조어를 경쟁하듯 만들어내는 것처럼, 방송도 트렌디함을 드러내기 위해 혐오표현이 들어간 단어들을 경쟁적으로 사용한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혐오표현의 조어들이 갈수록 강해지고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종의 언어유희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혐’의 조어들을 보면 이런 자극적인 변화 과정이 드러난다. ‘혐한’이나 ‘혐일’ 이전에 우리가 더 많이 사용했던 건 ‘반일’ 같은 단어였다. 우리는 역사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반일 감정’이란 표현을 그토록 많이 사용했었다. 이 ‘반일’이라는 단어를 ‘혐일’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순화되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대한다’라는 표현에는 그나마 이성적인 면이 어른거리지만 ‘혐오한다’에는 감정들이 넘쳐난다.

 

갈수록 강해지는 혐오표현에 담긴 일상화된 분노

‘혐’에서 더 자극적으로 나간 표현이 ‘극혐(極嫌, 극도로 혐오)’이다. 이 극혐이란 표현은 이제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농담의 하나가 될 정도로 자주 사용된다. 그래서인지 진짜 혐오하는 어떤 것이 생기면 ‘극혐’이라는 말로는 그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래서 ‘혐’은 ‘극혐’으로 ‘극혐’은 ‘개극혐’, ‘핵극혐’ 같은 더 강하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변화해간다.

‘혐’ 표현의 변화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제 혐오표현은 우리네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그건 언제 어떤 형태로든 폭력적인 행위로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 같은 잠재적 위험성을 갖고 있다. 요즘처럼 SNS를 통한 여론의 결집이 순식간에 이뤄지고 그것이 어떤 행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환경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무엇이 이런 혐오표현을 일상화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이 주는 좌절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주로 청춘들에 의해 인터넷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혐오표현에는 그들이 처한 답답한 현실에 대한 감정이 느껴진다. 무한 경쟁 속에 내던져져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그렇게 치열한 삶이 미래의 보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이런 현실을 야기한 기성세대를 향하기도 하지만, 엉뚱하게도 소수자 같은 약자를 향하기도 한다.

혐오표현은 이처럼 현실이 만들어내는 좌절감과 분노에, 이를 놀이화하고 일상화하는 인터넷 문화가 더해지면서 촉발된다. 더 심각한 건 일상화되기 때문에 그 표현에 대한 감수성이 둔감해진다는 점이다. 결국 더 강하고 자극적인 표현들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더 큰 언어폭력을 야기한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본질적으로는 일상화된 분노와 좌절감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그 혐오표현이 어떤 끔찍한 의미를 갖는가를 되새기는 일이다. 인터넷 문화에서 항상 문제로 지목됐던 말 표현의 감수성 제고가 어쩌면 혐오표현의 문제를 풀어가는 작은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정덕현 님은 대중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분석하는 대중문화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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