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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린 북〉

문화 이음 [2019.03] 눈치와 염치
영화 〈그린 북〉

글 남명희

 

<그린 북>은 특별한 만남을 통해 삶을 반성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다룬 영화다. 1962년 미국,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던 이탈리아계 백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가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본다. 셜리 박사는 발레롱가를 보디가드 겸 기사로 고용한 뒤 흑인에게 위험하기 그지없는 미국 남부 투어를 떠난다.

 

1

 

흑인과 백인의 위치 역전

내용만 보자면 <그린 북>은 오랜만에 만나는 ‘정석’적으로 매끈한 영화다. 대비되는 성격의 인물이 만나 갈등을 주고받다가 서로의 장점에 이끌린다. 세상의 불합리에 맞설 용기를 배우고, 세상 전체는 바꾸지 못해도 자기 자신이라는 작은 세상을 바꾼다는 흔치 않은 희망의 이야기다. 익숙하게 차곡차곡 진행되는 정석은 결코 지루함이나 단점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 다 똑같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 같지만 여러 음악가가 자신만의 걸출한 재능을 발휘하여 듣는 이의 마음에 감동과 정화를 안기듯 <그린 북>이 담담히 보여주는 감정의 완급 조절을 보면 양질의 작품은 맞다. 그러나 ‘정석’을 만들기 위해 실제를 그 틀에 맞춰 바꾼다면 문제다. <그린 북>의 감동이 실화 기반이라는 데서 오는 만큼 단점 역시 실화 기반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기인한다.

닥터 셜리의 유족은 셜리가 토니와 친하지도 않았고 흑인사회와 격리되지도 않았다고 말했지만 각본가 닉 발레롱가는 실명을 써서 자기 집안사람들을 미화하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닥터 셜리가 외롭게 격리된 인물로 묘사된 것은 영화 후반부에 토니 가족과 닥터 셜리가 흑백갈등을 초월해 한 식구처럼 어울리는 감동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발전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진짜로 요구하는 것은 강자가 변할 때까지 약자가 알아서 가만히 기다리며 강자가 보여주는 선량함에 마음을 푸는 것이다. 그래서 백인과 흑인의 위치를 역전하고 시작하는 영화의 설정은 기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닥터 셜리가 높은 자리에 앉아 토니의 면접을 보는 초반 장면은 이탈리아인이 백인들 사이에서는 차별받는 존재라 말하는 후반 장면과 이어지는데, 흑백 간 차별과 백인 내 이탈리아인 차별을 그대로 동일시하는 만용이 되고 만다. 알던 개념을 비틀면 새로워 보인다는 콘셉트에 도취해서 뒤집은 것 자체에 만족하다 보니 그것을 뒤집어도 되는지 고심한 흔적이 없다.

 

2

 

약자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강자들

약자의 생존이 달린 문제나 절박함이 어느 정도 수면 위에 떠오르면 강자들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치장에 쓰는 일은 자주 벌어진다. 혹은 약자의 생존 문제를 재미 삼아 유행어로 쓰거나 약자가 간신히 받은 주목을 자기한테도 끌어다 쓰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영화에서 제목으로 쓴 ‘그린 북’은 흑인이 안전히 머무를 수 있는 숙박업소를 모은 안내 책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는 차별이 만연했던 남부 지역에서 유색인이 생존하기 위한 필사적인 자구책이었다.

백인 폭력집단 큐 클럭스 클랜(KKK)이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던 흑인과 백인을 납치 폭행 후 살해한 ‘미시시피 버닝’ 사건이 1964년의 일이다. 그런 배경을 놓고 보면 1962년 흑인이 미국 남부에서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영화는 그 처절함을 막판 감동을 위한 백인 조연의 일침에 써버림으로써 관객들에게 ‘이런 거 처음 알았지’ 하는 훈계로 활용한다. 흑인들이 절박함에 만든 그린 북을 백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의 제목으로 썼다는 데서 이 영화가 품은 안이함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극중 또 다른 감동을 만드는 소재인 켄터키 프라이드치킨도 안이하기로는 만만치가 않다. 백인이 흑인에게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먹는 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편집 과정에서 굳이 살아남은 것은 지난 2월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올라온 제작진이 몽땅 백인 남자들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백인 위주의 세계관 안에는 깔끔한 성격의 닥터 셜리가 먹는 법을 새로이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먹을 것이 켄터키 프라이드치킨뿐이라 먹었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판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3

 

기득권자들의 오만한 무관심

영화는 1960년대 미국 남부가 흑인에게 무법천지 지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안전한 백인 남자도 있다’, ‘가난한 백인 남자는 흑인보다 환경이 더 나쁠 수도 있다’, ‘인종차별을 하는 악랄한 백인 남자는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닥터 셜리는 엉망진창인 사회에서 오직 품위가 자신을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극 중에서 셜리를 지켜준 것은 백인 남자의 정치권력이다.

이 영화는 토니 발레롱가를 통해 이른바 ‘사이다 서사’의 무용함을 짚고 넘어가는데, 영화 후반부에서 인종차별이라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느물대는 백인 남자는 정확하게 영화 전반부에 나온 토니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그 순간 토니는 좋은 게 좋은 것이지 하던 자신의 과거 모습에 더 격렬히 반응한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은 백인 주인공의 몫이고, 정작 흑인은 정치권력을 변칙적으로 사용한 자신을 탓하는 데서 멈춘다. 남부 시골 경찰서 유치장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생존 문제를 놓고 ‘통쾌하게 한 방 먹이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다’라는 후회를 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것을 흑인 인물의 겸양으로 활용하는 기막힘까지 과시한다.

<그린 북>을 감동적으로 볼 수는 있다. 모든 정황을 배제한다면 잘 다듬은 정갈함은 즐거우며 여기서 파생된 안온함은 감동과 연결된다. 하지만 미국 남부를 지나가며 흑인이 핍박받는 것을 보고서도 아름다운 풍경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조용히 있고 싶다는 이유로 약자가 당하는 핍박을 가볍게 넘기는 것은 몰염치함이다.

<그린 북>은 강자의 안이함이 어떻게 폭력과 이어지는지 극 외적으로 보여준다. 타인이 절박하게 느끼는 생존 위협이 별것이 아니기에 낭만적인 이야기 배경으로 쓸 수 있고, 기득권자인 백인이 좋은 게 좋다고 하는 이야기에 유색인이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은 품위가 없지 않겠느냐 운을 뗀다.

주변을 판단하지 않고 발언하는 것은 부덕함이다. 2010년대 백인인 미국 대통령이 소셜 미디어로 유색인과 비 기독교인을 비난·선동하는 시대에 ‘우리 서로 싸우지 말아요’, ‘품위 있게 편견을 이겨요’ 하는 메시지를 백인 남자가 외쳐도 되는가. 좋은 의도로 한 내 말을 그렇게(라고 쓰고 나쁘다는 함의를 넣어) 해석하는 네가 문제라고 판을 뒤집는 것이 강자의 권력이다. 특권은 당사자에겐 숨 쉬듯 자연스러워서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정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판단하지 않고 내뱉을 수 있는 것은 특권이고 오만함이다.

강자, 기득권자가 약자의 피해와 비극 앞에 감정적으로 동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득권자 상당수는 약자에게 동감하기보다 조심해서 주변 눈치를 봐야 하는 자기 신세에 더 감상적이 되기 쉽다. 눈치와 염치는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도취에 빠진 강자는 보기 흉한 것을 넘어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다.

 

 

남명희 님은 한양대 연극영화과 박사이며, 미국 드라마와 팬덤을 중심으로 한 문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저서는 「미치도록 드라마틱한 세계, 미드」, 「팬픽션의 이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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