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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 공감아이 대표

삶을 말하다 [2019.12] 기억이 치유를 만나다
임종진 공감아이 대표

글 나덕한 / 사진 봉재석

 

간첩조작사건 고문피해자들이 직접 기록한 사진전이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렸다. 선생님들과의 함께한 시간을 세상에 꺼내게 된 것이라고 얘기한 임종진 작가는 사진치유를 함께하고 전시를 기획했다. 세상은 온통 볼 것 투성이였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카메라에 담은 200여 점을 고르고 골라 전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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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고문피해자 자기회복 치유사진전

10월 30일부터 11월 17일까지 남영동 민주인권기념 관에서 ‘국가폭력 고문피해자 자기회복 치유사진전’이 열렸다. 강광보, 김순자, 故 김태룡, 최양준, 이사영 씨 등은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 1979년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1982·1986년 재일교포 간첩 사건 등 간첩조작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당한 채 교도소에서 5년 이상 복역했다. 모두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통해 결백이 인정됐지만 잔인한 고문과 수감 생활로 오랫동안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지닌 채 살아왔다. 그런 이들이 사진치유사 임종진 대표를 만나 함께 사진을 배우고 직접 찍은 사진 200여 점을, 당시 고문을 받던 남영동 대공분실(현재 민주인권기념관)에 전시했다. 끔찍한 고문을 받았던 곳에서 사진전을 여는 아이러니한 전시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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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마음을 치유하다

<한겨레신문>, <월간 말> 등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한 임종진 대표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사진기자 자격으로 여섯 차례 북한 땅을 밟았다. 처음 방문했던 날에는 ‘낮선 땅에서 과연 무엇을 찍어야 할지’ 긴장이 돼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남과 북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찍고 싶다”고 요청하며 자유롭게 평양 시내를 돌아다녔다. 결혼사진을 찍는 신혼부부, 아빠 와 함께 하교하는 아이, 강변을 걷는 연인과 같은 일상을 찍었다. 북한에서의 이런 경험들은 사진기자의 역할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저는 저널리스트의 사진보다는 사람이 우선인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그래서 퇴사 후에 캄보디아에서 1년 반 정도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람을 수십 년 찍어왔지만 사진의 폭력을 휴머니즘으로 포장되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사람이 우선이고, 사람을 위한 사진 영역을 찾다가 사진 심리상담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못 사는 나라의 사진들이 동정심을 유발하는 사진으로 활용되는 것에 가슴 아팠다. ‘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이 얼마나 가난한가’가 아닌 ‘얼마나 존엄한가’로 인식과 시선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그런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전달하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절망의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존엄성 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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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조작 피해자를 만나다

2015년에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진상규명을 돕는 단체 ‘지금 여기에’가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해온 것이다.
“처음 이야기를 듣고는 단순히 사진을 촬영하는 대신 사진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가 제안을 했어요. 2013년 광주 5·18 피해자분들과도 사진으로 치유작업을 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상처를 덜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해자들을 처음 마주한 뒤에 그가 처음 한 말은 주 변의 풍경도 좋고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것부터 찍으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싫어하는 것을 찍는 사람은 없다는 것. 사진을 찍는 것은 지금 이 시간을 추억하고 싶은 자신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켜고 끄는 법과 셔터 누르는 방법만 알려 드리고 좋아하는 것을 찍으시라고 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일종의 집단 상담을 통해서 각자의 얘기를 하면서 상대방의 처지에 귀를 기울이는 거죠. 그러면서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의지하게 됩니다. 사진은 그 다음입니다.”
임종진 작가는 그들이 일상을 사진으로 찍고, 행복한 기억을 쌓을 공간을 함께 다녔다. 꽃이나 새를 찍기도 하고 손주를 찍기도 했다. 카메라에는 좋아하는 것, 보고 싶은 것이 하나씩 늘어갔다.
“신기한 게 눈에 들어오면 사진부터 찍고 싶어졌어요. 아는 사람들과 배를 타러 갔는데 과자를 던져주니까 갈매기들이 난리가 난 거예요. 손에 와서 겁도 없이 받아먹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찍었어요.”
김순자 할머니는 세상이 온통 볼 것 투성이였다. 간첩조작사건만 아니면 여기저기 보고 싶은 것들을 둘러보면서 즐겁게 살아왔을 아쉬움에 그의 카메라와 휴대폰에는 수많은 사진들이 쌓여있다.
“사진은 자기 상처를 대면해서 직시하고, 원존재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구일 뿐이죠. 과거의 진실 규명도 필요하지만, 오늘을 어떻게 행복하게 사느냐가 이분들에게는 더 중요하거든요. 저는 동행만 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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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공간을 다시 마주하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궁극적인 목표인 치유를 위해서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공간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서 갖은 고문을 받았던 그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두려운 나머지 잘 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눈을 감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 공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상처를 안겨준 이 공간들을 찾아가는 겁니다. 두려움으로 시작한 감정은 분노라는 감정으로 변하고, 다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공간을 바라보게 되는 거죠.”
김순자 할머니의 동생인 故 김태룡 할아버지는 5번 조사실, 6번 조사실을 거푸 오가며 여기인지 저기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박종철 열사가 숨진 9번 조사실이 자신이 고문을 받은 곳 같았지만 오랜 기억을 더듬어 머리가 들어가지도 않는 좁은 창문으로 다시 밖을 바라본 뒤에야 6번 조사실이 맞는 것 같다고 회고했다. 수사관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는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지하철을 봤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2년 동안 반복적으로 방문을 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넘어 존재성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사진 치유 프로그램의 목적이 바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다시 바라보면서 스스로 마음이 전이되고 자신의 감정을 회복해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종진 대표는 “사진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상처와 대면하고 동시에 원존재로서의 자신과 대면하는 두 축을 조화시키면서 오늘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을 찾는 과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장치가 마련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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