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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슈 [2021.07] 성차별·성희롱 극복과 연대의 힘

글 권태선(리영희재단 이사장, 전 한겨레신문 편집인)

 

성차별·성희롱 극복과 연대의 힘

 

딸에게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라떼’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젊은이들이 “나 때는 말이야!” 하면서 이해도 공감도 안 되는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나이 든 사람을 꼰대라고 생각하니 커피도 ‘라떼’는 마시지 말라는 게 딸의 당부였다.

 

그런데, 그 꼰대 노릇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후배 기자가 나를 추천했단다. 그동안 그토록 꼰대 아닌 척 해왔건만 눈치 빠른 후배한테는 소용이 없었단 말인가? 내가 얼마나 세련된 사람인지 보여주려면 당연히 이 요청을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군대 내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숨진 이 중사 사건을 계기로 우리 젊은이들을 여전히 옥죄고 있는 성차별·성희롱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설득에 차마 거절을 못 했다. 차별금지법이 논란에 머문 채 법제화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을 포함한 차별의 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을 고려하면, 꼰대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나 때’의 경험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군대 내 성폭력 문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군이 여성에게 개방된 이후 여군들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점점 더 큰 문제로 드러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위계질서가 강한 폐쇄적 공간에서 소수인 여성이 다수인 남성과 함께 지내다 보니 성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성차별·성희롱 극복과 연대의 힘

 

그런 점에서 ‘나 때’의 언론계 여성들의 처지도 지금의 여군들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언론사의 수도 지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지만 거기서 일하는 여기자들의 수는 훨씬 더 적었다. 내가 1978년 한국일보사 수습 공채에 합격했을 때, 30명에 가까운 합격자 가운데 여자는 단 3명뿐이었다. 그나마 1975년 세계 여성의 해를 맞아 여기자만 따로 뽑았을 정도로 여성에게 열린 신문사였던 한국일보였기에 여성이 많이 뽑힌 거였다. 조선일보는 아예 공채론 여성을 뽑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 한두 명 특채로 뽑았으며, 동아일보 등 다른 언론사도 구색 갖추기로 여기자를 뽑는 정도였다.

 

그렇게 뽑힌 여기자들은 당시 기자훈련의 핵심으로 여겨졌던 경찰서를 도는 일에서도 배제됐다. 명분은 험한 일이라 여기자를 보호하는 차원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여기자를 동등한 동료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주요부서는 남기자들 차지였고 여기자들에게 주어진 일은 문화부, 생활부, 편집부 등이 고작이었다. 사내 결혼을 할 경우, 여성이 퇴직하는 게 당연했고, 출산휴가도 없어, 출산 후 퇴직했다가 2개월 아이를 두고 재입사했다는 선배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여기자가 부장 이상의 직책까지 올라가는 것은 너무나 희귀한 일이었다.

 

이렇게 ‘양념’ 정도로 여겨진 소수의 여기자들은 회사 안의 남성 동료나 선배, 또는 남성이 다수를 이뤘던 취재원들의 성폭력 대상이 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아니 없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일상적으로 성폭력에 시달렸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부서 회식 자리 등에서 남성들은 여성이 있든 없든, 아니 오히려 여성이 있으면 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음담패설을 해댔으니까. 지금은 그것이 성희롱이고 성폭력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이를 문제로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이런 남성들에 맞서는 대체적인 방법은 귀를 막고 못 들은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대찬 여기자들은 더 심한 음담패설로 맞받아쳐 남성들의 기를 꺾기도 했다. 지금 여성운동에서 미러링이라고 하는 것의 원조라고나 할까?

 

이런 언론계 풍토에 변화의 물꼬를 낸 것이 19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이었다. 민주 언론을 바라는 국민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한겨레신문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설 것을 다짐했다. 한겨레 창간에 함께 한 여기자들은 ‘여성편집위원회(여편)’를 만들어 한겨레가 그 다짐을 지면에서 잘 실천하는지 감시에 나섰다. 하지만 오랫동안 성차별적 관행이 지배적인 사회 속에 살아온 남성들이 성인지적 사고를 몸에 붙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겨레에 함께 한 남기자들은 물론 남직원들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 약자와 연대한다는 대의에는 동의했지만, 실제의 삶에서나 쓴 기사에서는 불쑥불쑥 오래된 잘못된 성인식을 노출하기도 했다.

 

성차별·성희롱 극복과 연대의 힘

 

한 사례만 들어보자. 2000년 10월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올브라이트(당시 미국 국무장관)와 포옹해보니 가슴이 탱탱하더라” 던가, 심야토론 자리에서 방청객으로 온 여성의 팬티를 보면서 잠을 깼다는 등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그 자리에 한겨레를 제외한 주요매체 기자들이 대부분 있었고, 그 가운데는 여기자도 있었지만, 오마이뉴스 외엔 아무도 이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오마이뉴스에 보도가 나온 날 편집회의에서 나는 우리도 이 내용을 기사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국무장관에 대한 우리 외교부 장관의 성희롱적 발언이 외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데다, 고위 관리가 여성 비하적 표현을 사용한 것 자체도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위원 중 누구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그 정도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편집위원회에 참석하는 유일한 여성인 나의 발언권은 그곳에 있는 남성 편집위원 모두의 발언과 같은 무게를 갖는다고 고집을 부려 겨우 내가 담당하고 있던 여성 면에 싣는 것으로 낙착했다.

 

기사를 내보내고 난 뒤, 편집위원장의 허락을 얻어 편집회의에서 오간 발언을 익명으로 처리해 사내 집배신 망에 올렸다. 우리 편집위원들의 성 인지 감수성에 대한 편집국 기자들의 판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저녁 편집회의에서 다른 편집위원들이 자신들의 발언 내용을 공개한 나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지만, 내게는 ‘여편’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 당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차례 논란을 일으킴으로써 한겨레가 성차별이나 성폭력 문제를 좀 더 민감하게 보도하게 만드는 일에 이바지했다고 오히려 자부했다.

 

‘여편’으로 지면에서의 성평등 실현을 감시한 한겨레 여기자들은 사내 성평등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에도 함께했다. 일반직 여사원들과 함께 여성회를 만들고, 인사 등에서의 성차별이나 사내에서 벌어지는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공동 대응했다. 여성회가 성희롱·성폭력 신고를 받아 사측에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고 성차별적 인사에 항의해 개선된 결과를 끌어내기도 했다.

 

물론 한겨레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조직보다 진보적이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의 항의나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먼저 단결해서 함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위의 편집위원회에서 벌어진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들은 오랫동안 성차별적 문화 속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차별이나 성희롱 문제를 문제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댈 곳 하나 없네/ 이젠 괜찮다 했었는데/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온 이 절망에 나는 또 쓰러져 혼자 남아 있네.”

 

세상을 떠난 이 중사가 자주 불렀다는 노래의 이 구절을 보며, 이 중사의 부대에도 우리처럼, 함께 맞서 싸울 동지들이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성폭력이든, 성차별이든,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에게 기댈 곳을 제공하고 함께 싸울 여성의 연대와 단결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어려워도 함께 하면 길이 열린다. “나 때는 그렇게 함께 헤쳐왔다!”

 

성차별·성희롱 극복과 연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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