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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기 [2022.12] [기후위기 속의 인권] ⑥ 복합적 삶의 위기, ‘나부터’ 생활혁명

글 강수돌(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인권」은 기후위기로 인해 소외당하거나 발생할 인권 침해의 오늘과 내일을 직시하고 경각심을 높이고자 ‘기후위기 속의 인권’ 연재를 기획하였다.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강수돌 교수가 선택한 대중영화를 통해 기후위기 사례를 알아보았다. 「인권」은 독자와 함께 2022년 기후위기와 인권위기를 넘어서는 변화와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지구 온난화로 상징되는 전 인류의 위기는 결코 온실가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 인류가 직면한 삶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대량채굴-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를 통해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의 문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활양식이 초래하는 자원 고갈, 지구온난화, 초미세먼지, 미세플라스틱, 거대한 쓰레기, 코로나 위기, 6차 대멸종의 위협, 사회경제 양극화, 빈곤의 세계화, 방사능(핵) 공포, 전쟁 위기 등 다차원의 위기를 나는 ‘복합적 삶의 위기’라고 부른다. 인류 전체가 직면한 이 복합적 삶의 위기는 우리의 기본 인권인 ‘생존권’ 자체를 벼랑으로 내몬다.

 

어쩌면 더욱 인간답게 살기 위한 ‘생활권 보장’ 주장은 이 생존권 위기 앞에서는 사치이거나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또한, 이 복합적 삶의 위기를 온 세상 언론이나 학계가 각종 사진이나 자료를 통해서 경고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해도 현실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발전소는 여전히 돌아가고, 자동차는 갈수록 늘고, 쓰레기는 넘친다. 정말 갑갑해지는 지점이다. 기본 인권인 생존권을 위해서라도 인류 스스로 변해야 하는데, 도대체 변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⑥ 복합적 삶의 위기, ‘나부터’ 생활혁명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왜 우리는 변하지 않는가?

 

내가 보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이유다. 하나는 우리 스스로 편리와 안락에 중독(Addiction)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이해관계(Interest)를 걸고 있는 자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태를 심층적으로 보면, 이 두 가지 측면은 서로 연결돼 있다. 즉, 자본주의로부터 이득을 얻는 집단(상위 10% 내외의 부유층, 권력자, 지식인 등)은 그 지배 질서가 주는 달콤함에 중독돼 있고, 중·하류층은 스스로 더 노력하면 10% 상류층에 들거나 그들과 비슷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동경하며(강자 동일시), 자본주의 생활방식이 주는 온갖 편리함과 안락함에 중독된 채 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식민주의나 노예제도에 대해선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반감이 별로 없다. 설사 약간의 거북함이 있더라도 ‘그 누가, 이 거대한 시스템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며 아예 처음부터 변화의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러니 무슨 근본적인 변화가 있겠는가?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역사를 길게 보시라.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약 1만년의 세월이 흘렀다. 원시 공동체 사회도 있었고, 노예제나 봉건제도 있었다. 그 뒤 지금의 자본주의, 또 자본주의를 극복하려고 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역사는 길어도 500년이고 지구 온난화와 기후위기를 초래한 시기는 최근 100년 사이다. 즉, 1만 년 인류 역사 중 현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는 500년이니, 인류는 95%의 기간을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았다! 인류의 생존 방식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도 얼마든 가능하다는 얘기다. 미래 지향적으로 보면, 인류의 생존권은 자본주의를 넘어설 때에 보장된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인류의 긴 역사 중 자본주의는 노예제나 봉건제를 타파하고 ‘신분의 자유화’나 ‘소비의 민주화’라는 역사적 성과를 냈지만, 지난 수백 년의 자본 운동 속에서 자원 고갈과 기후위기 등 복합적 삶의 위기라는 모순을 불렀다. 만일 우리가 이 모순을 극복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는 새 시스템을 만든다면 우리 후세의 생존이 지속 가능할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노 임팩트 맨(No Impact Man)>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변화는 누군가 붉은 깃발을 들고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고 외쳐셔 될 일이 아니라, ‘썩은 손톱 아래 새 손톱이 조금씩 돋아나 마침내 헌 손톱을 밀어냄으로써’ 올 것이기 때문이다. <노 임팩트 맨>의 주인공 콜린은 명상가이자 프리랜서이고, 그 아내 미셸은 직장인이자 쇼핑광이다. 두 살배기 딸도 있다. 미국 뉴욕의 도시민인 이들은 ‘기후위기 시대, 한 개인이 도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갖고 1년간 실험한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도시에 산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미 있는 실험이다. 그 제목은 ‘뉴욕 한복판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살아남기 1년 프로젝트’다. 한마디로, ‘나부터’ 생활혁명이다. 생존권이라는 인권(인간의 권리)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도리(인도)를 다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교훈은 이렇다.

 

 

함께 세상을 바꾸는 ‘나부터’ 실천

 

첫째, 문제 인식은 근본적으로, 실천은 작은 것부터 하는 것이다. ‘나부터’ 생활혁명의 시작이다. “변화가 필요할 때, 정부나 기관에서 해줄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나부터 그 변화를 시작하면 된다.” 사실, 전형적인 뉴요커인 콜린은 언론에서 종종 보도되는 ‘환경 문제’에 대해 혼자 걱정만 했지 정작 자신은 작은 실천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주는 편리함에 중독된 탓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럴 게 아니다’, ‘세상에 작은 기여라도 해야 한다’라는 느낌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부터’ 실천은 이렇다. 플라스틱이나 일회용품 안 쓰기,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다니기, 지역농산물 애용으로 음식 만들기, 음식물 쓰레기로 퇴비 만들기, 자전거 타기, 장거리 여행 자제, 전기 안 쓰기, 헝겊 기저귀 쓰기 등이다. 얼핏 쉬운 듯 보이나, 아무리 작은 일도 쉽진 않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 한 길은 열린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나부터’ 실천에 있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실천의 결과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보다 스스로 삶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진정성 있게 임하는 것이다. 요컨대, 삶에 대한 책임감이야말로 인간의 권리(인권)를 논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복합적 삶의 위기에 처한 오늘날, 삶에 대한 책임감은 (집착이 아니라) ‘포기’의 미학, (탐욕이 아니라) ‘절제’의 미학과 연동된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실천한다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우리는 자부할 수 있다.

 

⑥ 복합적 삶의 위기, ‘나부터’ 생활혁명

 

둘째, ‘나부터’ 실천하되, ‘더불어’ 실천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프리랜서 주인공인 콜린의 아내 미셸은 남편과 달리 전형적인 직장인이다. 매일 깔끔한 복장에 플라스틱이나 일회용 커피잔을 애용했다. 그러니 남편 콜린이 ‘나부터’ 환경 실천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 둘의 삶의 방식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어쩌면 아내 미셸의 생활 패턴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삶의 방식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콜린이 ‘나부터’ 실천을 하되, 그 아내와 가족의 삶에 대해 이른바 ‘꼰대’처럼 지시나 명령조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대화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하나씩 탈출구를 찾아 나가는 식으로 행한 것이다. 콜린은 자신의 올바름 때문에 타인과 고립되는 것이 어리석음을 알았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노 임팩트 맨>은 환경에 임팩트(악영향)를 주지 않되, 사람에게는 임팩트(영향력) 있는 실천을 함으로써 누구나 자본주의 중독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을 바꾸고 가족을 바꾸고 주변 사람들의 의식을 바꾼 임팩트! 콜린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한배를 타고 있다. 그것이 위안이다. 나만 두렵고, 외롭고, 걱정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어쩔 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서로 돕는 법은 알고 있다.”

 

그렇다. ‘나 홀로’는 두렵다. 그러나 소통하고 연대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인권을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

 

한편, 여기서 남는 구조적 문제는, 자본주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방식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이들이 그 문제점과 모순을 잘 인식하고 더 이상 이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대대적으로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영화 속 주인공 콜린은 간접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지금껏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주객전도가 일어났다고 말이다. 더 편리하다는 것은 더 많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더 많은 돈을 버는 것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곧 더 많이 일하기 위해,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그 돈을 다 소모해 버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우리는 자본의 회전 운동을 위한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게다가 자본의 회전 기계는 총체적 파국을 향해 달리지 않는가? 만일 인류 전체가 이런 진지한 통찰을 한다면, 그리하여 중독 시스템 자체를 포기하고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한다면 희망이 싹트지 않을까? 요컨대, ‘익숙한 삶과의 결별’이야말로 희망의 근거다. 이를 위해서라도 ‘서로가 서로를 돕기’를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무언의 화두일지 모른다.

 

셋째, <노 임팩트 맨>은 영화 자체를 생태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책임감을 스스로 실천했다. 우선, 영화는 파국과 공포, 두려움을 통해, 즉 충격 요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하기보다 유쾌하고 뜻있는 실천을 통해 감동을 준다. <노 임팩트 맨>의 감독 로라 가버트와 저스틴 쉐인은 ‘콜린’의 요구에 따라 영화 제작 과정에서부터 환경을 지키는 방안을 실행에 옮겼다. 촬영 과정에서의 ‘노 임팩트’ 프로젝트는 절약, 재사용, 재활용의 3가지 형태를 띠었다. 영화 촬영의 주 도구인 카메라도 새로 구입하는 대신 기존의 디지털 캠코더를 선택했다. 또, 한 명의 촬영기사가 작은 카메라와 무선 마이크로폰을 넣은 배낭을 등에 멘 채 촬영했다. 이 촬영기법은 주인공들을 좀 더 근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촬영하게 했다. 나아가 제작진은 자동차 대신 전철과 자전거로 이동했으며, 주인공을 따라가며 촬영할 때도 자전거나 인력거를 활용했다. 조명도 인공조명 대신 자연광이나 초를 최대한 활용했다.

 

물론, 나는 70억 인구 중에 과연 몇 명이 이 영화를 보고 감동받아 ‘나부터’ 그리고 ‘더불어’ 실천에 나설지에 대해서는 거시적 비관을 한다. 그러나 콜린처럼 ‘나부터’ 깨어나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작은 실천의 삶 자체가 우리 후손들에게 작은 교과서가 되리라 믿는다. 그 핵심은 자본주의와 중독에서 벗어난 새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지구 종말이 와서 인류의 대다수가 멸종하더라도, 최후에 살아남은 몇몇 중에 이런 진지한 실천을 배운 아이들이 있어 다음 세상을 이끌 새 출발이 된다면, 그리하여 후손들이 지속 가능한 인권을 누리고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재 ‘나부터’ 실천의 존재 이유다. 미시적 낙관의 근거다.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는 기업과 공공부문 노사관계, 이주노동자의 삶과 운동, 일중독과 건강 문제, 중독 시스템 문제 등을 연구했고, 주경야독을 하며 학생과 시민들을 위한 인문학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함씨네와 함께 하는 ‘나부터’ 밥상 혁명』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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