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1일 만우절에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였다. IT회사에서 일러스트러로 일했다는 한 청년 출연자가 들려준 경험담은 이랬다. 새벽 4시 반에 퇴근해 씻고 옷만 갈아입고 새벽 6시에 출근하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렇게 1년을 다닌 회사에서 처음 두 달은 7만 원을 월급이라고 받았다는 그는 “22시간을 일하면 다른 친구들보다 3배 더 많이 일하니 3배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했다. 이는 만우절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불행하게도 ‘열정페이’의 육성 증언이었다.

‘열정페이’는 2014년 유명 의류업체가 젊은 디자이너 지망생을 인턴으로 채용해 형편없는 보수를 지급하며 일을 시킨 부당노동행위가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면서 널리 쓰이게 됐다. 의류업계만이 아니라 IT, 공연, 영화, 방송 등에도 구직자가 넘치다보니 열정과 재능이 있는 젊은이에게 보수는 적게 주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주는 게 사회공헌이라고 착각하는 ‘사장님’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용절벽에 직면한 청년에게 열정(熱情)을 부추기는 세태와 불안정한 일자리의 낮은 임금(pay)을 강요하는 노동착취의 현실을 비판하는 신조어가 열정페이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청년과 노동을 대하는 태도를 묻는다. 이 서걱거리는 용어가 오락 방송에 등장할 정도로 일반화됐다면 청년들은 더 약탈당했다는 것이고, 우리 사회는 그만큼 더 불행해졌다는 의미일 터이다. 급기야 정부는 열정페이를 방지하겠다며 ‘일경험 수련생에 관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대통령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열정페이근절’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문제는 열정페이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열정페이를 비판하면서 청년들이 그리는 더 나은 세상은 어떤 것인지, 정부는 열정페이의 무엇을 ‘방지’하겠다고 하고, 정치권은 열정페이를 어떻게 근절하겠다는건지, 그리고 언론은 어디까지를 열정페이로 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 열정페이가 이야기되는 풍경은 어수선하다.

언론에 등장하는 열정페이는 뒤죽박죽이다. 올 2월 고용노동부가 국내 3대 주요 영화관 48곳을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한 결과 91.7%인 44곳이 각종 근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적발됐는데, 이를 두고 언론은 ‘영화관 열정페이 만연’이라 제목을 달았다. 마땅히 지급해야 할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부당노동행위도 열정페이로 봐야할까?

심지어 무급 인턴 채용 자체를 ‘열정페이’로 간주한 보도도 있다. 지난 2월 유럽연합(EU)의 감사원격인 옴부즈맨실은 EU 산하 기관의 무급 인턴을 유급으로 전환하라는 권고를 했는데, 이를 두고 열정페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무급에서 유급으로 바꾸라는 이유가 우리의 열정페이와 의미상 반대에 가깝다. 무급이면 가난한 청년은 인턴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열정(熱情)의 우리말 사전 풀이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다. ‘열정’에 해당하는 영어 ‘passion’은 서양 고대로부터 이성과 대비되는 감정을 가리켰고, 특히 영혼을 마비시킬 정도의 격정을 뜻했다. 이성에 가려 있던 감정(경험론 철학에선 정념이라 한다)이 중시되기 시작한 건 근대 경험론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경험론 철학이 도덕과 인간 의지의 원천이라며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20세기 들어 예술가의 예술혼이나 학자의 학구열을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열정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우리나 서양이나 열정이 직업과 관련되어 요란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들어서의 일이다. ‘꿈’을 꾸라고 닦달하더니, 2000년 중반 들어 ‘열정’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꿈을 이루려면 열정이 있어야 하며, 열정을 가질 때 일의 성취감도 커진다는 것이다. 또한 열정은 설명도 측정도 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래도 열정페이가 분명히 지목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열정이 청년을 응원하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희망을 박탈하는 세상에서 꿈을 꾸라고 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세상을 탓하지 말고 열정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라는 주문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열정이 강요되는 세태가 밉다고 열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목욕물과 아이를 함께 버리는 꼴이 된다.

유병선 님은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고장난 자본주의에서 행복을 작당하는 법>, <보노보 혁명> 등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