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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정착촌 방문이야기 외
등록일 : 2017-08-18 조회 : 118

“우리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기나 했간디요.

이렇게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처음인갑네요.”

 

한센인 정착촌 방문이야기

 

찾아가는 국가인권위 광주인권사무소

 

 

 

07-04-01

 

네모 우리는 코가 멍이 들고, 어긋나서 이제는 돼지똥 냄새가 안 나 …

 

동네 입구에 주차했다. 끊어졌던 기억을 잇고 싶어서였을까. 한참 마을을 걸었다. 성큼 자란 잡초와 동물의 배설물 냄새가 여전했다. 1개월 만에 찾은 셈인데 깊은 곳에 머물렀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침 저 멀리 김희진 할머니(가명, 85세, 여)가 집안으로 들어서고 계셨다.

 

“4월에 왔을 때보다 돼지똥 냄새가 심해졌는데 잘 계셨어요?”라고 먼저 말을 건넸다. 김 할머니께 서는 금방 알아채고 경로당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시며 전동휠체어를 세우셨다.

 

“우리는 코가 멍이 들고 어긋나서 이제는 돼지똥 냄새가 안 나. 돼지 키워 돈도 많이 벌었고… 참, 그때 주시고 간 커피를 여태까지 먹고 있는데, 다시 오겠다고 하시더니만 잊지 않고 또 오셨네.”

 

일단 토방에 털썩 앉았다. 식구들 안부를 묻는 질문에 저기 길 옆에서 짖고 있는 흰둥이와 둘이란다. 김 할머니는 ‘현애원’이라는 한센인 마을에 살고 계신다. ‘호혜원’이라는 또 다른 한센인 마을과 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한센병은 1873년에 한센(Gerhard Henrik Armauer Hansen,노르웨이; 1841~1912)에 의해 발견된 나균에 의한 만성 감염병이다. 우리나라는 제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하고 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은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결핵균보다 발병률이 낮으며, 치료받지 않은 환자와 장기간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발병한 후에도 면역 기능에 의해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한센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2006년 소록도병원 환경개선, 한센인 복지정책 개선, 특별법 제정 등을 골자로 정책 권고를 한 바 있다. 이듬해인 2007년 10월에는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이 제정되고 나서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를 통해 법에서 정한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길이 열렸으나, 이들을 향한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따뜻하다고 할 수 없다.

 

 

 

07-04-02

 

유현길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착과 차별로부터의 벗어나고 싶은 욕구의 상징이다.

 

“우리 땅은 하나도 없어. 이 마을 모든 땅이 광주에 있는 주교관 땅인데 나도 죽으면 이 집이랑 축사가 어떻게 될는지 나도 모르지.”

 

현애원 마을에는 한센인 1세대와 2세대가 함께 산다. 주민이 살고 있는 집이나 축사, 논은 실제로는 모두 개인이 이용하지만 법적으로 개인 소유인 경우는 없다. 한센인들이 정착할 무렵 천주교 재단에서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작권이 주어졌을 뿐이다.

 

김 할머니 집 현관문에서 불과 3미터 앞에는 빈 축사만 남았고 집 주변에는 빈집이 많고 폐허가 된 축사가 보기 흉할 정도로 즐비하다. “한때는 2백 마리 넘게 돼지를 키웠고, 소도 키웠어. 이 마을에서 돼지를 키운 것은 육영수 여사가 암수 2마리를 갖고 온 것이 시작이여. 우연히 내가 수퇘지를 키우게 됐어. 한 마리는 다른 사람이 가져갔어. 그 돼지로 수를 불렸는데 몇 마리로 늘어났는지 모르겠는디, 겁나게 키웠어. 돼지는 남편이 죽고 그만뒀는데 15년은 됐제.”

 

과거 1세대만 100가구에 이르렀는데 현재는 절반으로 줄었고, 그만큼 빈 축사도 늘어만 갔다. 오랫동안 그냥 방치한 이유를 묻자 축사를 헐 수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단다. 내 토지가 아닌데다가 철거비용도 만만치 않고, 동네 사람들은 예전부터 이런 환경에 익숙해서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단다.

 

현애원이 있는 곳은 광주광역시와 나주시에 인접한 농촌지역에 가까운 도농복합지역이다. 이 마을의 현재 마을명은 ‘유현길’이다. 원래 행정구역상 유곡2구인데, 인근 주민들이 현애원을 꺼려하고, 버스를 탈 때도 멀리 떨어져 앉는 등 차별을 심하게 당해 새도로명을 만들 때 민원을 냈다고 한다. 이 기회에 동네 이름만이라도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유현길. 유곡리의 ‘유’자와 현애원의 ‘현’자를 따와 유현길로 명명한 것이다. 유현길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착과 차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의 상징이 되었다.

 

 

 

07-04-03

 

“우리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기나 했간디요.

이렇게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처음인갑네요.”

 

한센마을에서 살아온 주민의 이야기를 직접 듣자며 ‘찾아가는 순회상담’을 준비했다. 그들의 생존권과 환경권은 우리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이장이 주민들에게 순회상담이 왔다며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스무 명 가까이 모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도시락을 꺼내고 마을회관에 마련된 상을 펴자 누군가 말했다. “우리랑 누가 밥을 같이 묵을라고도 안했죠. 병을 옮기지도 않는디…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면 기가 막히죠.”

 

『날아라 펭귄』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고, 과일이 나왔다. 간담회가 시작되자 박 할아버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기나 했간디요. 이렇게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처음인갑네요.” 최 할머니는 외관상 티가 별로 안 나서인지 현애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지 이런데서 왜 사냐’는 질문을 받곤 한단다. 그래서 외지에서 만난 사람이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편견을 가질까봐 답변하기가 무척 곤란하다고 한다.

 

젊었을 때 이장을 10여 년 넘게 했다는 전 이장님은 면사무소에서 회의를 할 때면 내 옆에는 아무도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며 분통해했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그냥 듣고만 있기에 너무 미안하여 지금 당장 저희도 뭔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없다며 발뺌(?)을 하려 하자 김 할머니가 ‘이렇게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처음인갑네요’라며 괜찮다고 했다. 그제야 서먹해하며 자리를 뜨려던 분도, 바쁘다던 분들도 자리를 고쳐 앉고 살아온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남이 들어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마음에 묻어 둔 이야기를 털어낼 때 나는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늙은 사람들이 우리를 꺼려요. 젊은 사람들은 별로인데… 그만큼 우리가 어려서 병이 걸렸을 때 우리를 보기가 무서웠던 거지요. 지금은 남동생의 처가 나를 꺼리나 봐요. 그래서 앞으로도 통 없는 폭으로 알고 살아야 할 것 같네요. 남편 여동생도 병이 있는데 자식을 낳고 그 애들이 한 번씩 와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김 할머니에게 마을 한 바퀴 돌고, 집에 가겠다고 하자, 분뇨 수거하는 곳은 가지 말라고 하신다. ‘그곳은 코가 멍든 우리도 가기 힘들다’는 말에 부끄러워졌다. 사실 걸어오던 길에 이미 외면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의 삶의 기반을 외면했다며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이렇게 얘기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순회상담을 왔다가 오히려 따뜻한 마음을 받고 가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오겠다며 인사를 드리자 드러누웠던 흰둥이가 벌떡 일어나며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제법 꼬리를 친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현애원 주민들의 삶은 마을 전체가 종교재단의 시혜 아래 살기는 하지만 국가는 최소한의 보호만 해주고 있다. 다음에 왔을 때는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좀 더 나아지길 조심스레 기원해 본다. 인권

 

 

 

송병관 님은

국가인권위원회 광주인권사무소에서 교육협력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뜨거운 상상력,

인권감수성이 피어나는 곳

 

대구인권사무소 별별인권체험관

 

찾아가는 국가인권위 대구인권사무소

 

 

 

07-04-04

 

네모 뜨거운 계절 여름이 왔다. 그리고 나는 대프리카에 있다. 대구와 아프리카를 합친 신조어 ‘대프리카’처럼 대구의 더위를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 그런데 이 더위에 뜨거운 열기를 더 보태는 곳이 있다. 다행히 사람을 더워 죽게 만드는 열기는 아니다. 한증막의 열기처럼 사람을 편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열기다. ‘인권’이라는 건강한 열기를 생산하는 그곳은 바로 ‘별별인권체험관’이다.

 

대구광역시교육청이 폐교를 체육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면서 교실 일부를 제공받아 2013년 7 월 17일 별별인권체험관이 개관하였다. 느낌터(전시공간), 읽음터(도서관), 움직터(창작체험교육실), 봄터(영상실), 기념촬영공간(사진 남기기) 등 다양하게 구성된 공간에서 체험형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된다. 2013년 개관 당시 59회 인권교육 프로그램, 1,598명의 참여를 시작으로 2015년에는 124회, 1,887명까지 늘다가 2017년 3분기까지 해도 벌써 101회의 인권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지금껏 대구·경북지역의 이주민, 장애인, 아동·청소년 시설 및 공공기관 종사자, 공무원 등 지역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이 이곳에서 ‘인권’과 관련된 이야기를 생생하게 주고받았다. 특히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전체의 80~90%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사고가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상상력과 감성이 매우 풍부해지는 아동 청소년시기. 이러한 시기에 자신의 권리를 알고, 타인을 존중하며, 인권을 실천할 수 있는 인권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별별인권체험관이 바로 그런 곳 중의 한 곳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인권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동?청소년이 ‘저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제는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화해할래요’, ‘인권침해를 당하는 분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등의 소감을 말할 때, 인권퀴즈를 풀며 세계인권선언문을 읽고, 인권게임으로 땀을 흘리며 체험관을 이리저리 뛰어 다닐 때, 삼삼오오 모여 학교나 가정,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권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토론하며 서로 발표하겠다고 ‘저요 저요’라고 떠들 때, 인권영화를 보면서 진지한 눈빛으로 집중할 때… 그런 친구들과 함께하는 나, 이때가 가장 벅차고 뜨겁다.

 

07-04-05

 

문득, 체험관 맞은편에 위치한 ‘불로’시장, ‘불로’동의 ‘불로(不老)’라는 지명의 유래가 떠오른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패해 도망가던 중 한 동네에 들렀더니, 전쟁 중이라 어른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아이들만 버려져 있어,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없다’는 뜻으로 ‘불로’가 되었다 한다. 불로라는 지명에는 전쟁으로 인해 아이들이 처한 곤경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 후 천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이들 앞에 놓인 곤경은 만만치 않다. 여전히 아동·청소년 인권이 침해당하기 쉬운 문화와 환경에 이들의 인권을 지켜줄 이는 별로 없다. 슬픈 지명의 유래가 있는 곳 바로 옆에 별별인권체험관이 있다. 물리적 공간이 무슨 상징성이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인권실천가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이 체험관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이들의 인권이 없었던 ‘불로’를 체험관이 마주보고 있는 것은 ‘너희는 외롭지 않아, 늘 지켜보고 함께하겠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체험관에 다녀가는 모든 아동·청소년들이 인권에 대해 느낄 뿐만 아니라 타인을 존중하고, 모두가 다르지만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경험하고, 인권을 실천할 수 있는 감수성의 공간이 되도록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인권 

 

 

 

오민우 님은

대구인권사무소 아동인권모니터링 코디네이터, 별별인권체험관 인권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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