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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를 찾아서 외
등록일 : 2017-12-01 조회 : 578

11-07-01

<일제 때부터 사용되어왔던 한센인 거주촌으로 소록도에서는 이를 병동으로 지칭한다>

 

찾아가는 국가인권위 소록도

수용시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①

 

  소록도를 찾아서

 

 

 

 

 

01 수용시설의 기원격인 소록도

 

수용시설은 여러 이유로 집단적으로 격리하여 관리하는 시설을 말한다. 어감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나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취약계층을 집단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연속된 흉년으로 인한 기근·전염병이 창궐했고, 이로 인해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을 보듬겠다며 서구열강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적 의미의 사회복지시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시초를 1885년 아동보육시설인 영해원으로 보고 있다.

 

소록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한센인(당시 나환자로 지칭됨)들을 강제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전국에 약 1만 5천 명의 환자가 있다고 추정되었고, 이들을 위해 선교사들이 전국 23개 정도의 요양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설치하면서 전국의 요양소를 폐쇄하고 한센인들을 소록도에 강제수용하였다.

 

 

 

소록도는 일제의 선전용

 

일제가 한센인을 소록도에 수용한 것은 치료와 구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에 ‘일본이 나환자 치료와 구제사업을 하고 있다’는 선전 그리고 이를 빌미로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던 요양소를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한센인을 대거 강제 수용한 시점이 1919년 3·1독립운동의 직후이자, 식민지 지배의 유지와 강화를 위해 ‘문화정치’를 시작한 시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일제는 소록도를 ‘자애의 성과’로 선전해왔다.

   

11-07-02

<한센인을 일시적으로 감금했던 감금실이나 1970년대 임시 거주지로 개조해였다고 한다>

 

 

 

사회로부터 완전한 ‘격리’ 목적

 

소록도는 초기에는 100명을 수용하였으나, 일제 말기에는 6천 명에 달하였다. 이를 위해 소록도에는 3차례에 걸친 확장공사가 진행되었고, 그 공사를 통해 감금실, 단종대(斷種台), 화장터, 만령당(납골당), 중앙공회당, 초창기의 진료소, 선착장, 백악(白堊)의 등대, 큰 우물, 소록도신사 본전과 참배당, 일본 황태후의 어가비(御歌碑), 형무소, 병동, 창고 등의 모든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소록도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다.

  

 

 

 

 

한센인에 대한 감금 합법화

 

일제가 한센인들의 치료를 위해 소록도 요양소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일본의 「나예방법」을 모법으로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1935년 「조선나예방령」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나예방령」에 의하면 일제는 당시 한센인에 대해 △ 일정 직업 종사 금지 △ 대중 집합장소 출입금지 △ 나요양소 강제 입소 명령 △ 입소자에 대한 징계 또는 검속 등을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특히 나요양소에 있는 한센인에게 30일 이내의 근신, 7일 이내 감식, 30일 이내 감금(60일 이내 연장 가능) 등에 처할 수 있는 인권유린 조항이 있었다. 이 조항은 △ 도주하거나 도주하려고 할 때 △ 타인의 물건을 사용하거나 또는 공용품을 점유한 때 △ 다중 취합하여 진정, 청원을 하려한 때 △ 직원 기타 자들에 대해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려 한 때 △ 안녕 질서를 해하거나 또는 해하려고 한 때에 적용되는데, 치료하거나 보호 목적이 아니라 감금하고 통제하려던 것임이 명확했다.

 

11-07-03

<소록도 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인데, 십자가가 한센인이 붕대를 감은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단종과 낙태, 강제노역과 수탈

 

소록도는 원래 남녀를 분리하여 거소하게 하였는데, 1936년부터 단종수술을 전제로 부부동거를 허락하였다. 당시에는 나균이 태아에게 전염된다고 보았고, 고환 등에 나균이 번식한다고 생각하였기에 단종수술을 강요했고, 심지어는 임신한 여성을 낙태시키기도 했다. 1949년 소록도 수용환자는 6천 1백 명이었는데, 출생아가 45명에 불과했으며, 1958년에도 수용환자가 5천 6백 명에 달하였으나, 출생아가 13명이었다는 사실이 단종과 낙태가 횡행하였음을 숫자로 보고하고 있다.

 

또한 3차례에 걸친 확장공사로 인한 강제노역,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가차 없는 징벌이 있었음이 보고되었다. 일본이 전쟁에 몰입하면서 소록도 내 제탄, 가마니, 송지 채취, 토끼 모피 생산, 벽돌 제조, 생활용품 등 소록도 내 모든 것을 수탈해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열악한 생활과 치료환경… 이로 인한 높은 사망률, 도주

 

소록도에서는 일본식 의복착용, 신사참배 강요 등의 일본식 생활양식이 강제되었다. 치료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식사는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9평이 안 되는(약 29㎡) 목조 초가지붕의 숙사에 10명의 한센병 환자가 기거했으며, 하루에 1인당 44전 9리(그중에 식비 약 24전)으로 생활해야만 했다. 1931년 기준, 당시 일본식 덮밥이 15전 정도이었으니 식사비 24전이면 덮밥 2끼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였다.

 

이러한 인권유린은 높은 사망률과(1917년 사망률 26.26%, 이후 평균 6~9%, 1944~1946년 사망률 22.53%), 많은 이의 도주(1933년~1941년 도주 인원수 310명)로 이어졌다. 급기야는 소록도 병원의 제4대 원장인 스오 마사스가 원생인 이춘상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11-07-05 

<국립 소록도 병원 한센병 박물관>

 

 

 

섬주민에 대한 토지수탈, 민간 강제 모금

 

“나환자들의 수용소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 세계에 조선총독부가 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로 충분하므로 그렇게 알라.”

 

조선총독부 내무부지방국 제2과장 오오츠카(大塚常三郞)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일제는 소록도에 나환자들을 강제수용하면서 이를 자애의 성과로 선전하였으나, 그것뿐이었다.

 

소록도 갱생원 확장공사비는 민간인들에게 강요한 기부금으로 대부분을 충당하였으며, 확장에 필요한 토지는 섬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확보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단종, 가족 분리, 강제노역… 터전 마련의 꿈마저 짓밟혀

 

해방의 날이 왔다는 것도 소록도 주민들은 뒤늦게 알았다. 해방이 되면 자유가 찾아올 거라 믿었으나 소록도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한센인에 대한 단종도 이어졌고, 자녀와의 분리거주도 여전했다.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한센인에 대한 인권유린은 지속되었다.

 

한센인들이 소록도를 나와 다른 지역에 정주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한센인에 대한 모멸과 거부, 냉대가 이어졌다. 1957년 경남 사천 서포면 비토섬에 건너가 땅을 개간하던 한센인을 인근 비토리섬 주민들이 죽창, 낫, 괭이 등으로 무차별 공격을 한 사건이 있었다.

 

1962년 음성 치유자가 정착할 수 있는 터전 마련을 위해 진행된 오마도 간척공사에 많은 한센인은 노역으로 힘을 보탰으나 임금도 지급 받지 못했다.결국 인근 주민들의 반발로 인해 터전을 마련한다는 꿈마저 짓밟혔지만 남은 건 공사과정에서의 사고 등으로 인한 피해뿐이었다.

 

이밖에 1960~1970년대 한센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공학반대사건, 1991년 실종된 개구리 소년 관련하여 경북 칠곡군 소재 한센인 마을에 매장되어있다는 허위제보로 인해 한센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한센인 정착촌에 대한 강압적 가택 수색 등의 인권유린이 있었으나 그 누구도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았다.

 

11-07-04

<나병에 대한 캠페인 포스터와 자료>

 

 

 

차별과 수탈의 역사적 교훈의 장소로 남길

 

현재 소록도는 국유지로 지정되어 있어서 일반 주민은 거주하지 않으며 대부분 국립소록도병원의 직원과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로 약500여명이 거주 중이다. 이 중 150여명이 소록도 병원에 장기요양형태로 입원 중이며, 그 외는 거주지역에서 생활 중이나 환자의 대부분이 70세 이상의 고령자이다.

 

2016년 100주년을 기념하여 소록도에는 한센병 박물관이 설립되어 당시의 자료와 물품 그리고 한센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그밖에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의 인권침해 실상을 보여주는 검시실, 감금실, 갱생원 신사, 형무소 등이 상당하게 보존되어 있다. 소록도는 우리나라 수용시설의 시발점이자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가한 탄압과 수탈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 역사적 가치와 교훈이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

 

소록도내 한센인의 연령을 고려할 때 소록도의 활용방안에 대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구체적 계획을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한센병 기념관에 그치지 않고 소록도가 수용시설의 아픈 역사에 대한 경험과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장으로 발전했으면 한다. 02

 

 

 

이인영 님은

장애차별조사1과에 근무하면서 국내인권현장탐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던 소록도를 방문, 수용시설에서의 인권침해 문제 등을 연구하였습니다. 이 글에 쓰인 관련 자료는 타카오 에이지의 「조선한센사」를 참조하였습니다.

 

 

 


 

 

 

11-07-07

 

찾아가는 국가인권위 제주도

제주 사회복지분야 인권감수성 향상과정 프로그램

 

사회복지, 인권과 만나다!

 

 

 

01 광주인권사무소와 제주평화인권센터, 제주특별자치도 사회복지협의회가 같이 준비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11월 3~4일 이틀 일정으로 제주에서 진행 된 ‘사회복지분야 인권감수성 향상과정’이 그것이다. 이 과정은 지난해 사회복지사 중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였다. 인권의 관점에서 시설 사회복지사들의 열악한 처우 문제를 살펴보고, 장애인의 노동권도 다룬다. 프로그램은 알차게 준비했지만 사회복지사들이 매우 바쁘다는 11월에 진행되는 거라 많은 분들이 오시지 못할 거 같았다. 그러나 이런 기우를 비웃듯이 안내가 되자마자 문의가 잇따랐고, 조기에 마감됐다.

 

여기서 김리아, 현나나, 그리고 이수경 씨를 만났다. 이수경 씨의 친정은 필리핀이고, 김리아, 현나나 씨는 캄보디아였다. 외국 출신 사회복지사라?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교육을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신선했다. 흔한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분들은 사회복지사가 아녔다. ‘사회복지분야 인권감수성 과정’이라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 참여할 것이란 나의 편견이 오만하게 작동한 것이다.

 

이분들은 결혼 8~9년차로 제주에서 살면서 제주이주민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한국말에 익숙하고, 농사 일로 잔뼈가 굵은 김리아 씨는 제주도 사투리까지 간간히 섞어가며 교육 분위기를 이끌었다. 10월 초부터 우연한 기회에 제주이주민센터에서 3개월을 일하게 되었는데 한용길 사무국장이 ‘의무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근무하려면 인권교육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참여를 권유하여 참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교육내용이 도움이 되었는지. 약속이나 한 듯이 세 명의 얼굴에는 미소가 띠었다. ‘생소하면서도 정말 재미있었다’고 했다. 노동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노동인권교육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 지를 느꼈다고 했다. 같이 짝을 이뤄 앉은 이수경 씨는 ‘눈물을 흘렸다’며 김리아 씨가 귀띔을 해주었다. 교육을 준비한 입장으로 인권을 주제로 소통하고,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 내심 뿌듯했다.

 

 

 

11-07-06

 

또 다른… 인권 감수성을 만나다

 

이야기는 교육을 마치고 초저녁까지 이어졌다. 제주평화인권센터가 10주년을 맞아 진행한 일일호프집에서 이분들의 진솔한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김리아 씨는 사실 교재가 낯설게 다가온다고 했다. 한국말을 할 수 있어도 읽거나 쓰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함께 인권을 고민한다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한국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라고 모두가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었는데,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우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된 자료를 제공했어야 한다는 자책이 들었다. 이러지 말자고 인권감수성을 말하던 것 아니겠는가! 인권 환경 조성은 상대의 수가 많고 적음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평소의 생각에서 어긋났음이 분명했다.

 

인권감수성은 추상적이고 거대한 ‘이념’이 아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상호존중에 기반한 ‘구체적인 생활’ 그 자체이다.

 

계속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김리아 씨는 나의 민망함을 대범하게 품어 안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이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단다. ‘농사일 때문에 읽고 쓰는 것을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이들과 같이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하고 있는 센터일은 계속해서 하고 싶다면서 오늘의 느낌을 이어가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또 다른 ‘감수성’을 만난 ‘제주 사회복지분야 인권감수성 향상과정’이었다. 02

 

 

 

송병관 님은

광주인권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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