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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 언니
등록일 : 2017-12-01 조회 : 69

12-06-01

정의와 민주주의를 향한 여학생의 투쟁사

 

12-06-02

 

저자_ 서명숙

출판사_ 문학동네

2017. 5. 18

 

 

 

시민의 단합된 힘은 냉엄하고 불의한 국가 권력을 무릎 꿇게 만든다. 우리는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에 그 힘을 경험했다. 부러지지 않는 풀과 꺼지지 않는 촛불이 있는 한, 혹한 속에서도 풀은 자라고, 바람이 지나고 나면 초에 불이 다시 붙는 것을 배웠다. 40여 년 전의 ‘영초 언니’도 그러한 희망과 기개로 모진 세월을 용감하게 맞섰다.

 

『영초 언니』는 서슬퍼런 유신정권, 군사정권 시대에서 부당한 국가 권력에 끊임없이 맞서 투쟁했던 실존 인물 천영초에 대한 기록이다. 1970년대, 저자가 우연히 천영초라는 인물을 알게 되고, 그녀와 동고동락을 하며 일어났던 크고 작은 투쟁사와 무고한 시민들의 눈물과 피와 한이 서린 그 시대의 뒷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영초 언니는 ‘전태일’만큼 강렬한 저항운동을 한 사람이었다. 영초 언니 곁에 있던 이들이라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그녀를 통해 독재에 대한 저항을,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품었다. 저자 역시 제주도에서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부모님의 자랑이 되는 것도 잠시, 영초 언니와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시위에 쓰일 유인물을 제작·배포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초 언니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정의를 향한 타는 목마름은 성공의 문턱을 단번에 넘지 못했다. 당시의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그러했듯 영초 언니와 저자 역시 ‘산천초목 사건’이라는 이름의 기획수사 아래 누명을 쓰고 거짓 진술을 협박당하고 잔인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옥살이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자유와 민주주의 쟁취의 대가는 신체와 정신 외에도 남은 생까지 깊게 새겨 넣었다. 시위를 주도·가담한 이들은 대학에서 제적당하거나 취업길이 막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굴복하거나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남은 인생에 조명이 다 꺼진 것과 같은 징벌을 내리는, ‘긴급조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초 언니는 접을 수도 없고 꺾을 수도 없는 풀이었다. 저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자유기고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영초 언니는 불의와 맞서는 뜨거운 심장을 언제까지고 켜놓을 듯 보였다. 수배, 구류, 민중당 창당 등 끊임없는 굴곡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영초 언니가 홀연히 한국을 떠난 건 교사의 폭행과 친구들로부터 왕따로 괴로워하는 아들을 보며 이 나라에 대한 마지막 애정과 미련을 모두 놓아버린 탓이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간간히 전해오는 평온한 안부가 전부이면 좋으련만, 영초 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 두 눈을 잃고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옛날의 그 뜨거운 기억을 모두 잊고, 몇 마디의 단어만 간신히 내뱉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그 시대의 사건과 감정을 유려한 글쓰기로 생생하게 기록했다지만 저자가 영초언니를 회상하는 일은, 기쁨이나 즐거움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초 언니를 역사에 기록하기로 하고 펜을 잡았던 것은 작년에 전국을 경악과 분노로 뒤덮게 만든 국정농단 사태 때문이었다.

 

최순실은 특검조사를 받으러 가며 카메라를 향해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너무 억울해요!”라고 소리 쳤다. 국정농단 부역자의 입에서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말이 나오니 그 순간 저자는 최순실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영초 언니와 무고한 시민들이 모진 고문을 받으며 애타게 찾던 ‘민주주의’의가 같은 단어일지 의심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단어가 맞는 단어였는지 싶어 게슈탈트 붕괴현상을 겪으며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도 하게 된다.

 

처절한 저항운동으로 정의에 한 발짝 다가가는 데 큰 역할을 한 영초 언니이지만 지금 그녀를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정 불순한 세력이 정의, 법,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려 할 때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공기처럼 우리 곁을 지켜줄 때마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매번 불러야 한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 영초 언니와 그 시대의 행동하는 시민들이 쌓아올린 민주주의, 그 풀밭이 이제 좀 무성해지지 않을는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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