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분쟁전문 PD는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을 취재하며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뛰고 있습니다. 현재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피란민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세계는 왜 싸우는가』, 『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간인을 향한 총구
유리 네치포렌코라는 14살 소년은 우크라이나 부차에 살고 있다. 한 달 전 소년은 일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을 당했다. 3월 17일 오전 11시.
“나는 그 장소와 시간, 날짜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소년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유리는 아버지 루슬란(49)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약과 식량을 구하러 구호품을 나눠주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부차는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 인근 도시로, 당시 키이우로 진격하려는 러시아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지하 방공호에 숨죽이며 숨어 있었고 이내 전기, 가스, 식수가 끊겨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웃들이 고통받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유리의 아버지가 그들을 위해 생필품을 구하러 나섰다. 부자는 출발 전, 민간인임을 알 수 있게 하얀 베갯잇을 찢어 만든 백기를 자전거에 꽂았다.
그렇게 위험한 길을 나선 유리와 아버지는 도중에 갑자기 러시아 군인을 만났다. 그들은 곧장 두 손을 들었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음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순간,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아버지에게 러시아 군인이 총을 쏘았다. 아버지는 가슴 쪽에 총알 2발을 맞고 힘없이 쓰러졌다. 러시아 군인은 유리에게도 총을 쏘았고, 소년은 왼손을 맞고 땅에 쓰러졌다. 이윽고 군인은 소년의 머리도 쏘았지만, 운 좋게 머리를 감싸고 있던 후드티만 뚫고 나갔다. 유리는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군인이 그들을 지나쳐 탱크를 타고 가는 사이에 무작정 뛰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남겨둔 채.
아버지를 두고 온 죄책감에 울던 유리를 보다 못해 유리의 어머니는 흰색 스카프를 둘러썼다. 민간인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사건 장소로 향한 유리의 어머니는 러시아 군인들에게 애걸한 끝에 간신히 남편의 시신을 둘러메고 왔다. 유리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집 정원에 묻었다. 유리는 우리 취재진 앞에서 무표정하게 이 모든 장면 하나하나를 설명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어린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 끔찍한 기억이다.
403명의 목숨
유리는 부차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의 핵심 증인이다. 부차에서는 러시아군에 처형당한 후 집단매장된 민간인 시신 403구가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는 이를 ‘집단학살(Genocide)’로 규정했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럽의 나라들은 21세기에 유럽이라는 문명 세계에서 이 같은 집단학살이 일어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반면 러시아는 이 죽음을 두고 우크라이나 현지의 군 당국이 벌인 자작극이라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서로 상대국이 한 일이라며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차에는 많은 민간인 목격자들이 있다. 유리도 그중 한 명이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민간인임을 알리기 위해 백기를 꽂거나 흰 스카프를 둘러썼었다. 그들을 쏜 상대는 분명 러시아군이었다는 증언과 증거가 속출하고 있다.
누가 이 일을 벌였는지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망한 민간인들의 존재다. 그 구덩이에서 발견된 403명 모두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이자 누이들이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였다. 각자 꿈이 있고, 미래가 있었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이웃이었다. 그 귀한 생명이 손이 뒤로 묶인 채, 혹은 비닐에 쓰레기처럼 담겨서 구덩이에 묻혔다. 이들 중 누가, 자신이 이렇게 음식물 쓰레기처럼 버려질 것이라고 상상이나 해봤을까. 더 끔찍한 사실은, 지금은 부차 한 군데 정도만 밝혀졌지만 앞으로 러시아가 점령한 다른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집단학살의 현장이 더 많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
인류는 지난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수많은 인명을 잃었다. 그 희생 위에서 뼈아픈 반성과 함께 유엔을 설립했고, 제네바협약을 만들었다. 제네바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9년 8월 12일에 체결된 것으로, 협약의 목표는 전쟁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전장에 있는 병력 중의 부상자와 병자의 상태 개선을 위한 협약(적십자협약이라고도 부른다), 해상에 있는 병력 중의 부상자와 병자 및 조난자의 상태 개선을 위한 협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협약,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 등을 포함한 4개 협약이다. 이상 4개 협약으로 이루어진 제네바협약은 모든 유엔 회원국이 가입했으며, 주권을 가진 나라들은 이 협약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우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운다. 제네바협약에 따르면 무장한 군인이 민간인을 조준해서 쏘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 제네바협약은 일련의 여러 사건으로 깨졌다. 특히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중 벌어진 민간인 학살 및 집단매장은 명백하게 제네바협약을 어긴 것이다. 전쟁과 민간인 사망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민간인을 겨냥한 폭격이나 학살은 금지되어 있으며, 이는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원칙이다.
그런데 왜 이번 부차 사건 같은 비극이 벌어지고,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내전에서 민간인들은 보호받지 못할까? 민간인들은 비무장 상태로 무장 상태인 군대와 대적할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전쟁 중에 총을 든 사람과 총을 들지 않은 사람이 맞붙어 싸우면 누가 죽겠는가. 그래서 군인이 민간인을 총으로 죽이는 것은 매우 비겁한 일이다. 때론 경제적 이해관계로, 혹은 패권 싸움으로 전쟁이 일어날 순 있다. 그러나 어떤 전쟁에서든 이 원칙만큼은 최우선으로 지켜야 한다. 제네바협약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생명을 잃은 대가로 만들어진 값비싼 협약이다. 제네바협약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인류의 유산이기도 하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왜 어른들이 제네바협약을 깼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도 나쁘지만, 그 전쟁을 방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는 이번 집단학살이 우리 세대에 벌어진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전쟁 속 민간인 지켜내야 할 것
전쟁의 피해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만 입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날까지도 평범한 일상을 보냈을 우크라이나 시민 모두가 이 전쟁의 피해자다. 키이우에서 주부이자 직장인이었던 율리아(38)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 부부는 10년 동안 돈을 모아 누구나 꿈에 그리는 아파트를 장만한 지 불과 두 달밖에 안 되었다. 우리의 전 재산과 시댁 돈까지 끌어들였다. 그 아파트를 사기 위해 우리는 한 번도 돈을 맘껏 써본 적이 없다. 그런 우리 아파트가 폭격을 맞았다. 이 억울함을 어디 가서 말해야 하나.”
자동차 할부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쟁통에 불에 타서 차를 버리고 피란했다는 사람,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너무나 신이 났던 청년, 더는 학교를 갈 수 없게 된 아이들, 아빠가 우크라이나군에 징집되어 엄마와 아이들만 추운 날씨에 걸어서 국경을 넘는 가족들…. 이렇게 수많은 가족이 이산가족이 되고, 그 와중에 노인들은 피란조차 가지 못한다. 다리나 허리가 아파서 멀고 험한 피란길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취재원의 전화 통화에서 들리는 그의 할머니의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라. 우리는 여기서 너희를 기다리마”라는 말이, 마지막 인사처럼 슬프게 들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피란을 떠날 엄두도 못 낸다. 이 모두가 전쟁이 낳은 피해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듣는 전쟁은 너무 뻔하고 관념적이다. 하지만 그 뻔한 뉴스 속에 저렇게 애절한 민간인들의 사연이 있다.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이번에 알려진 부차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제대로 규명하고, 국제 사법체계를 통해 단죄하는 일이 그것이다. 우리에겐 이를 위한 시스템이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도 있고, 제네바협약도 있다. 이 시스템을 가동하여 전쟁에서 민간인의 인권을 최소한이라도 지켜줄 수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윗세대에게 물려받았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우리가 받은 그 유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시간이다.

제네바법(Law of Geneva)
출처 : 대한적십자 국제인도법의 분류 중/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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