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버스의 진동, 자동차의 엔진 소리, 기차와 유람선의 흔들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방랑자들>에서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것이며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유랑하는 방랑자다. 엄마의 따스한 품속에서 열 달을 웅크리고 있다 차갑고 시끄러운 세상으로 덩그러니 던져져 무수한 나날을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질투와 근심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존재들.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수직과 수평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여행일 수밖에 없다. 안정된 삶 혹은 정주된 삶을 꿈꾸지만 언젠가는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고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배움과 삶에 대한 열망이 미지의 문 앞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기도 한다. 그러니 떠나야 할 때는 떠나야 한다. 불우한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힘든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도보 여행을 택한 <와일드>의 셰릴, 달려야 했기에 묵묵히 앞만 보고 미 대륙을 횡단한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 검프, 자발적으로 유목민의 삶을 택하곤 작은 밴에 몸을 실은 <노매드랜드>의 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의 예처럼, 무수한 길 위의 영화들 역시 멈추지 않고 움직일 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자아와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중 가장 보통의 존재처럼 느껴지는(뉴욕 맨해튼의 자가 소유 여부는 차치하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줄리아 로버츠)의 이야기를 좀더 살펴보자. 리즈는 뉴욕의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삶도 결혼 생활도 겉보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리즈는 이혼을 결심한다. 이혼의 슬픔을 극복하던 중 만난 젊은 배우 데이빗(제임스 프랭코)과의 관계조차 휘청대던 어느날, 리즈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일과 사랑을 뒤로한 채 1년간의 여행을 계획한다. 이탈리아에서 먹고, 인도에서 명상하고, 발리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는 여행. “3장의 비행기 표가 복권”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첫 번째 도착지 이탈리아에서 발견하는 것은 잃어버린 미각이다. 이탈리아인의 삶의 속도와 뉴요커의 삶의 속도가 같을 리 없다. 이탈리아인들은 맛있는 커피 한잔, 맛있는 스파게티 한 접시에 진심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줄 아는 여유는 리즈가 오랫동안 잊고 지낸 감각이다. ‘달콤한 게으름’ 혹은 ‘무위의 행복’ 쯤으로 번역 가능한 ‘돌체 파 니엔테’(Dolce Far Niente)’의 교훈은 분명하다. 흐르는 시간에 가만히 몸을 맡겨도 괜찮다는 것.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것. 여기서 문득 생각난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 산문집 <오래 준비해온 대답>의 한 대목. “왜 노토 사람들은 그토록 먹는 문제에 진지해진 것일까. 그들이 삼백 년 전의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이든 나폴리 피자든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룰 이유는 없다.

이탈리아를 떠나 인도에 도착한 리즈는 아쉬람에서 영적 수련과 공동체 생활을 이어간다. 자신을 용서하기, 타인을 이해하기 그리고 타인을 위해 기도하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부대껴 사는 동안 우리가 끝까지 붙잡고 수련해야 할 과제는 결국 이런 것들이 아닐까. 미련도 체념도 모두 털어버리고 나면 스스로에 대한 질책과 사랑했던 타인에 대한 원망과 죄책감도 수그러들기 마련이라는 것을 리즈는 서서히 깨닫는다. 그리고 도착한 종착역 발리. 이곳에서 리즈를 기다리는 건 사랑이다.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결론이 허무할 지도 모르겠지만, 새로운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문을 닫고 또다른 문을 열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3장의 비행기 표는 리즈에게 완벽한 복권이 되어주었다. 복권에 당첨되길 원하면 복권부터 사라는 말은 이렇게 살짝 바꿀 수도 있겠다. 변화가 필요하면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환경을 바꾸라고. 혹은 태도와 생각을 바꾸라고. 그런 이유에서 여행은 변화를 위한 비교적 손쉬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예전과 비교해 여행의 허들은 낮아졌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행이 최고의 인기 여가 활동 중 하나가 되어버리면서, 다시 말해 여행이 일종의 유행이 되면서 생긴 문제도 있다. 바로 오버 투어리즘이다.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관광객이 관광지에 몰려들면서 관광객이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는 훼손되고 주거비는 상승하고 주거권은 침해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의 로마와 베네치아 등 다수의 도시에서 오버 투어리즘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광세를 인상하거나 관광지의 입장 인원을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처럼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려면 이제 2유로를 내야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오버 투어리즘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때, 시민들은 ‘당신의 휴가는 나의 고통’과 같은 푯말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관광객들을 향해 물총을 쏘아댔다. 바르셀로나는 올해 4월부터 휴가용 숙소 이용객에 대한 세금을 기존 1박 평균 6.25유로에서 12.5유로로 두배 가량 인상하기로 했다.
나의 즐거움이 타인의 고통이 되는 여행을 두고 좋은 여행이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길을 떠난 여행자들에겐 지속가능한 여행에 대한 책임도 뒤따른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차츰차츰 불어나는 숙박세와 야금야금 얇아지는 지갑 사정에 눈물이 난다. 그럼에도 현지인과 여행자가 모두 만족스러울 수 있는 지속가능한 여행에의 해답 찾기는 필요해 보인다. 진즉에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어볼 걸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글_ 이주현 ㅣ 전 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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