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은 헌법 34조를 아는가? 바로 떠오르는 헌법 조항이 아닐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헌법 34조의 시대를 새삼 시작했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거치면서 헌법을 다시 배웠다.

정부가 없다
정혜승
당초 우리 사회는 헌법 1조를 금과옥조처럼 외쳤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다. 유신 독재와 5공화국에 맞서 1987년 민주화 투쟁에 나선 시민들은 주권이 독재자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헌법 1조를 각성했다.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
이헌재
헌법 제34조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말한다.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리한 6개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 국가는 사회안전망을 갖춰야 한다고 헌법에 명시했다. 여자의 복지와 권익이 노인과 청소년, 신체장애자와 함께 묶였다. 헌법은 정부로 하여금 약자에 더욱 신경쓰라고 이들을 열거했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라는 제6항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이다.
이 같은 헌법 34조를 각별히 강조한 이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다. 당대 관료집단의 대부와 다름없던 그는 헌법 34조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2017)라는 대담집에서 “국가의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헌법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34조를 언급했다. 이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라고 했다.
“국가의 자원을 쓸 권한을 국민에게 위임받은 정부는 ‘인간다운 생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를 보장해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출발하면 우리가 복지국가로 가야 하느냐, 경제성장으로 가야 하느냐의 논쟁이 필요없습니다.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헌법을 만들 때 이미 합의됐다고 봐야 합니다.”
-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 23쪽.
이헌재 전 부총리는 이런 주장에 대해 좌파라고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하며 “우리 헌법은 조금도 좌파적이지 않은 헌법”이라고, “지금의 헌법은 당시의 기득권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모여 최소한의 합의를 거쳐 통과시킨,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사회적 합의’의 실체”라고 강조했다.

애덤 코노버: 정부가 왜 이래
다큐멘터리
이처럼 복지와 권익 향상, 재해 예방과 국민 보호가 헌법정신이라는 데 수긍하지 않을 이는 없다. 다만 핵심은 디테일에 있다. 헌법 34조에 따라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세심한 정책을 필요로 한다. 재난과 참사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지만 위기는 평등하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장대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본 적 있는가? 폭우로 곳곳에 물이 넘치고 흙이 무너져 내릴 때 산자락 단독주택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이의 불안함을 난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짓단이 젖는 불편함 정도는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근처에도 못 간다. 도시의 고층 아파트 사람들은 살림살이가 다 젖은 기억이 없다. 재해를 예방하고 국민을 보호할 책무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정부는 좀 더 정확하게 정책을 펼쳐야 한다.


위험한 곳을 먼저 살피고, 소외되기 쉬운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 고령자, 독거노인, 거동이 불편한 이, 만성질환자 같은 약자와 건강한 보통 사람들에 대한 관리와 지원이 달라야 한다. 이미 헌법 34조 5항은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별도로 정하고 있다. 정보 접근부터 대피와 구조 활동, 의료와 돌봄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이들에게 찾아가는 공공 지원이어야 한다. 예컨대 해마다 ‘가장 더운 여름’이라는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기후온난화 시대에 온열질환 사망자의 60~70%는 고령층이다. 이제 가장 뜨거운 한낮에는 야외 노동을 막아야 하고, 에어컨이 기본값으로 설치되어야 하는 기후라는 것을 인정하자. 농촌의 어르신들이 한여름 가장 뜨거운 시간에 논밭에 나가지 않도록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고, 쪽방촌 노인들이 피신할 수 있는 에어컨 빵빵한 쉼터가 동네마다 있어야 한다. 초고령사회에서 고령층 보호에 각별히 신경을 기울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정부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자. 정부는 국민이 정신을 바짝 차릴 때만 일을 잘한다. 약자를 지원하기보다 강자를 챙기는 데 급급한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은행들이 파산하자 미국 정부는 소비자를 구제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소비자 대신 월스트리트의 대형 은행만 구제했다. 중요한 순간에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정부가 아니라면 정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가 대형 위기에서 힘 있는 자를 우선 지원하는 것이 정상인가? 정부는 종종 로비에 밀려 국민 보호를 뒷전으로 미룬다. <애덤 코노버: 정부가 왜 이래>(The G word with Adam Conover, 2022)는 코미디언이 정부 시스템을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다.
1992년 미국 정부는 특정 업계 편을 들어주면서 식품영양 기준을 변경, 신선한 과일과 채소 권장량은 절반으로 줄이고, 곡물은 2배로 늘렸다. 2019년에는 돼지고기 검사관을 40%로 감축해버렸다. 정부 농업 보조금은 절반이 농업 대기업들 몫이다. 국민 세금으로 구축한 기상정보를 민간 기업이 유료화해버린 과정도 적나라하다. 기업 로비에 밀려 국민 보호를 뒷전으로 미루는 정부, 예산을 아낀답시고 정부의 필수적 역할을 축소하는 정부도 모두 국민들이 투표로 선택했다. 일 잘하는 정부를 가지려면 깐깐하게 따져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권」
글_ 정혜승ㅣ북살롱 오티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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