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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다보기 [2018.05] 혐오를 찍어내는 사회

글 홍재희

 

‘용감 무식’이라는 말이 있다. 즉 뭘 몰라서 용감할 수 있다는 표현인데 현실은 그 반대다. 아이의 무지는 동심이지만 어른의 무지는 ‘용기’가 아니라 ‘폭력’을 낳는다. 나는 익숙하고 편한 것이 어떤 이에게는 불편하거나 부당한 일일 수 있다.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상처 또는 모욕이 될 수 있다.

 

여러 표정의 가면 뒤에 숨은 사람의 그림입니다

 

 

당신은 소수입니까?

 

내게는 당연한 행동이 타인에 대한 혐오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게 약자에게 피해자에게 혐오를 드러내고 상처를 입히는 가해자 또는 공범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들 대다수는 혐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일상 곳곳에 공기처럼 차별과 혐오가 스며들어 있다. 특히 SNS와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는 일상다반사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조롱, 비하와 같은 혐오 폭력이 일어난다.

 

권력과 경제력 여부로 나이와 학벌과 직업에 따라 위계와 서열을 따지며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 젠더, 국적, 인종이 다르다는 것이, 장애가 있다는 것이,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 되고‘혐오’의 대상이 된다. 혐오는 심각한 사회 문제이자 인권유린임에도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를 혐오하는 자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 한마디로 인권 감수성, 젠더 감수성이 부재한 사회다. 게다가 자신이인권 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약자에게 공감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적대감과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 공감 능력이 결핍된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다.


모든 혐오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진다. 혐오는 결국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대졸–군필–중산층이 보편이자 기준이다. 모든 제도와 이데올로기가 이를 당연시하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권력을 쥔 기득권이 된다. 반면, 사회적 약자란 계급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열세이며 힘의 우위에서 불평등한 조건에 놓여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 모두를 일컫는다.

 

어느 사회든 존재 자체로 열등한 취급을 당하고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이주노동자, 동물 등이다. 소수자는 사회에서 수적 열세인 소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등과 정의 실현에서 사회 전 영역에서 소외되는 자를 소수자, 즉 사회적 약자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 전체에서 여성은 수적으로는 소수가 아니나 소수자로 규정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남성과 평등한 권력을 쥔 여성은 없다. 여성은 정치·경제·가정 등 사회 전체에서 다양하게 차별받기 때문이다.

 

혐오는 당연하지 않다

 

혐오 문제에는 자신을 우월하게 보는 반면에 타자를 열등하고 미천하게 보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데 우월감은 비교 대상이 있어야만 느낄 수 있다. 사회에서 차별받는 사람은 혐오할 만한 이유가 있는 열등한 인간들이므로 내가 혐오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고방식. 따라서 나보다 열등한 타자는 차별하고 혐오공격을 해도 된다는 혐오 논리가 성립된다. 이런 편견으로 무장한 사람은 약자에게 반인권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경제 여건이 악화되면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힘없는 약자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의 원인을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찾기보다는, 이를 사회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사회적 약자에게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더 빠르고 손쉽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혐오는 그 피해가 단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문제다. 혐오 논리는 대상을 바꿔가며 확장된다. 남성이 여성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이성애자가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데에서 나아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차별하는 소위 갑질까지 당연해지는 것이다. 혐오가 힘을 얻고 일상화되면 어느 누구나 파편화된 개개인이 되어 언제든지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절대 다수가, 평범한 시민들 우리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힘없는 자가 차별받고 배제되는 사회에서 실질적인 ‘평등’은 존재할 수 없다. 정의 또한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가 존중받고 살 수 있다면 그 사회에서는 모두가 잘 산다. “The last, the first”라는 말이 있다. 가장 약자가 우선이라는 뜻이다.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가장 힘없는 자, 약한 자를 우선할 때부터 비로소 평등은 구현된다.

 

혐오에 빠지지 않기

 

반세기 넘게 흑백 인종 분리 정책으로 악명을 떨친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공 진실 화해 위원회’를 이끌었던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인종 혐오를 종식시키는데 바탕이 된 우분투(Ubuntu) 철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비로소 한 사람이다.”(A person is a person through other person.) 우분투(Ubuntu)는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은 여러 사람과 한데 묶여 있으며 나의 인간성은 당신의 인간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남성으로서 기득권자이지만 동성애자로 소수자일 수 있다.


나는 여성으로서 약자이지만 이성애자로서 기득권자일 수 있다. 나는 성 소수자로서 약자이지만 한국인으로서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달리 기득권자이다. 나는 남성으로서 기득권자이지만 장애인으로서 사회적 약자다. 그렇다면 남성이자 이성애자이자 비장애인이자 한국인인 당신은 한국사회에서 당신의 정체성으로도 이미 기득권자일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당신이 여성이자 장애인이자 성 소수자이자 외국인 이주노동자라면 약자 중의 약자일 것이다. 소수자 중의 소수자일 것이다. 이렇듯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으며 고정된 채 불변하는 정체성은 없다. 인간인 우리 모두는 성, 젠더, 인종, 계급, 민족, 종교 등에서 다양한 범주로 이루어진 유동적이며 복합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타인을 발견하고 그 타인의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라는것을 인식해야 한다.


혐오에 물들지 않으려면 인권 의식과 젠더 감수성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길러야 한다. ‘공감한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감’은 ‘동정’이 아니다. 동정은 동정하는 사람과 동정받는 사람 간에 위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공감은 내가 너보다 더 우월하다는 의식을 버리고 동등하게 서로를 대하는 것이다. 공감은 소통이고 타인에 대한 존중이며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파괴하거나 손상시킬 수 없다는 인식론적 대전환을 의미한다.


사람은 사물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제가 아는 만큼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 그게 바로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당연하거나 자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연하다는 생각에 물음표를 붙이는 태도, 즉 비판적 성찰이 있어야 이해와 공감이 시작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순식간에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 고정관념에 대해 항상 의문을 품지 않으면 언제든지 혐오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편견의 동물이다. 비판적 성찰을 게을리하는 순간, 타인에게 무관심해지는 순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지 혐오를 자행하는 괴물로 전락한다. 무릇 사람이라면, 사람답게 살려면 항상‘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혐오에 빠지지 않는 길, ‘사람다운’ 길이다

 

홍재희 님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장편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우리 사회의 혐오를 다룬 <그건 혐오예요>를 펴냈습니다.

 

화면해설.

이 글에는 여러 개의  뒤에 자신을 숨긴채 남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표현을 하고 있는 의미의 그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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