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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인권 [2018.06] 우리 고전문학에서 만나는 인권 - <운영전>의 경우

글 조현설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운영전>이라는 소설이 있다. 17세기 초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작가에 의해 창작된 한문 소설이다. 안평대군의 처소였던 수성궁이 배경이고, 유영이라는 화자가 꿈에 만난 두 연인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라 <수성궁몽유록>으로도 불린다. 청춘남녀의 비극적인 연애를 다룬, 대단히 인상적인 조선시대 소설이다.

 

옛 나무 창살 창문틀을 배경으로 꽃이 피어있는 그림입니다.

 

소설 속 안평대군은 누구인가? 그는 세종의 셋째 아들로 시·서·화(時·書·畵)에 능해 삼절(三絶)로 불린 인물이자 형 수양대군에 의해 사사(賜死)된 당대의 풍운아였다. 안평은 남호(용산) 근처에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문인들을 초청해 시회를 열곤 했는데 담담정이 바로 소설 속의 수성궁이다. 그는 수성궁을 조성하고 어린 궁녀 10명을 선발, 시문을 교육해 시회를 즐겼고, 젊은 문인들을 초청해 시를 짓고 품평을했다. 안평은 수성궁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실현된 문예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삐딱하게 말하자면 권력자의 우아한 놀이터로 기획했던 것.


그런데 이 놀이터에 명성이 자자하던 김 진사라는 유생이 끼어들면서 안평의 이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느 날 김 진사를 불러 초서를 쓰게 할 때 안평은 가장 아끼던 궁녀 운영한테 벼루를 맡긴다. 그때 김 진사가 휘갈긴 붓에서 튄 먹물 한 방울이 운영의 손가락에 떨어졌고, 먹물은 연애의 불씨가 된다. 운영의 연애 감정은 운영을 비롯한 궁녀들을 유가적 숙녀 혹은 수녀로 만들고자 했던 안평의 기획에 파열음을 만들어낸다. 이제 수성궁의 기획자 안평대군과 운영을 필두로 한 궁녀들의 전선이 조성된다. 수성궁의 담장을 전복해야 하는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안평대군은 당대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권력에 맞선 청춘남녀의 연애는 필경 비극을 향해 질주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말에 이르는 사정은 복잡하지만 결국 운영은 자살에 이르고, 운영을 잃은 김 진사도 식음을 전폐하고 운영의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의 비극은 화자인 유영한테로 전염된다. 유영은 속세를 등진다.
< 운영전>은 비극성 때문에 고전이 되었지만 비극적 결말 자체보다는 결말로 치닫는 과정에서 울려 나오는 궁녀들의 목소리가 더 심장하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선발되어 수성궁에 던져진 궁녀들의 호소 안에는 인류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물음이 서리서리 배어있기 때문이다. 운영과 김 진사의 연애가 들통나고, 운영의 연애를 궁녀들이 도왔다는 사실까지 탄로나 곤장형으로 죽게 되었을 때 ‘한마디만 하고 죽겠다’며 궁녀들은 입을 연다. 궁녀 은섬은 이렇게 말한다.

 

남녀의 정욕은 음양으로부터 받아 귀천 없이 사람마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궁궐에 갇히고 난 뒤 우리는 그림자를 벗 삼아 외롭게 지내왔습니다. 꽃을 보고는 눈물을 삼켰고, 달을 보면 넋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 궁궐 담장을 넘기만 하면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알 수 있건만 그렇게 안 한 것은 그럴 만한 힘이 없어서거나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였겠습니까? 오직 주군의 위엄이 두려워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궁궐 안에서 말라 죽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지은 죄도 없으면서 죽을 곳에 놓였으니 저희들은 죽어서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서슬 퍼런 유언이다. 죽음을 생각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항변이다. 은섬의 유언에는 욕망을 지닌 보편적 인간을 부정하지 말라는 구호가 숨어 있다. 나아가 남성들의 놀이터에 여성을 가두지 말라는 원한의 칼날도 품고 있다. 운영과 제일 친했던 궁녀 자란은 은섬의 항변을 이어 한 걸음 더 나간다. 김 진사와 운영을 만나게 해 두 사람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한다. “주군에게 이것보다 큰 적선(積善)은 없을 것”이라고 대든다. 마침내 운영대신 자신을 죽여달라는 말로 호소를 맺는다. 수성궁이라는 유가적 이상의 감옥에 갇혀 있는 궁녀들의 인권 의식이 두 사람의 사랑을 도화선 삼아 이토록 강렬하게 폭발했던 것이다.
궁녀들의 맹렬한 항변에 안평대군은 분노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안평은 궁녀들을 용서했지만 운영은 그날 밤 비단 수건에 목을 맨다. 수성궁은 풀만 무성한 폐허가 된다. 인간의 정욕은 사육될 수 없는 것이다. <운영전>은 인권, 특히 여성의 인권에 대해 아우성치는 우리의 고전이다.

 

조현설 님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신화와 옛이야기의 매력에 빠져 한국과 동아시아의 신화와 민담 연구에 힘쓰며 청소년에게 고전문학과 구비문학을 활발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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