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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담긴 풍경 [2018.07] 독박육아 끝에 찾은 엄마의 행복권

글 허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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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스마트폰, 컴퓨터, 각종 콘솔 및 전자기기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다. 그에 걸맞게 이를 이용하여 즐기는 ‘게임’이라는 매체는 우리 삶 속에 익숙하게 자리 잡은 즐길 거리가 되었다.

 

남자친구가 도와주는 거지?

“애는 어쩌고 여기 있어요?” 늦은 저녁 야근을 하거나 주말에 출근하면 종종 듣는 질문이다. 너무 많이 들어 익숙한 물음이지만 여전히 썩 기분 좋게 넘겨지진 않는다. 일을 하고 있는 내게 마치 “당신, 왜 애 안 보고 여기 왜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아서다. 꼭 내가 못 낄 데를 낀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과연 남기자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할까. 남편도 야근이나 회식을 할 때마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줘야 할까.

 

육아휴직부터 직장맘까지

출산과 육아는 삶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동시에 많은 것을 차단했다. 운 좋게 육아휴직 1년을 모두 사용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사회생활이 완전히 멈췄다. 대단한 걸 쌓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조차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아이와 단둘이 섬에 고립된 것처럼, 회사 동료나 취재원, 친구는 물론 누군가와 일상의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었다. 30년을 그저 나만을 위해 살아온 내게 갓난아기는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아이를 낳은 이후의 삶은 어떻게 다져가야 하는 지 등의 진지한 가르침을 주는 이도 없었다. 한순간에 엄마가 됐고, 모성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떠밀림과 함께 아이와 남겨졌다. 아이의 존재가 남편에게도 꽤 많은 변화와 무게를 얹어주었겠지만, 적어도 남편은 자신이 쌓아올린 것들을 무너뜨리지는 않는 듯 보였다. 그의 일상은 크게 다름없이 이어졌다.

아이를 갖고부터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휴직 동안 목이 죽죽 늘어난 티셔츠를 입으며 살다가 다시 구두를 신기까지, 그리고 아기가 어린이가 된 지금까지도, 그 사이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걱정과 한숨, 앞이 캄캄해지는 막연함과 괴로움이 배여있다. 출산율의 소수점에 전전긍긍하며 아이를 낳으라고 닦달하지만, 정작 부모 둘이서 아이 한 명을 키우기도 너무나 버거운 게 현실이다. 둘의 힘으로 꾸린 가정, 둘이 벌어야 웬만한 생활을 유지하겠는데, 아이를 마음 편히 맡길 곳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도 하루가 멀다 하고 우울한 뉴스들의 연속이니 불안하다. 매일 아침 생판 모르던 남에게 아이를 맡기고, 어린이집 한 칸에 아이를 맡겨놓고 나오는 매정한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자식들 다 키우고 이제 겨우 한 시름 돌린 부모 세대는 다시 할머니, 할아버지로서 양육에 매달려야 한다. 옆에서 챙겨줄 할머니, 할아버지마저 없는 나에겐 그마저 마냥 부러운 일이다.

 

줄타기의 연속인 날들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허울 좋은 목표를 두고 잘 하겠다는 욕심을 버린 지 이미 오래다. 남에게 폐나 끼치지 않고 내게 주어진 몫을 기본만이라도 하며 버티고 싶은데 어쩐지 늘 힘이 달린다. 아이를 봐주는 어린이집과 돌보미 이모님, 그리고 회사의 선후배들에게 수시로 미안함을 표시해야 한다. 어린이집 단체 사진에서 우리 아이만 원복을 입지 않았거나 깜빡하고 어제 먹은 식판을 닦지 않고 그대로 보내는 것은 하는이제는 애교 수준이다. 주중에 부족했던 시간을 채워주기 위해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 바람이라도 한 번 쐬고 들어오면 자정을 넘겨서까지 밀려 있던 집안일을 한다. 월요일 출근길부터 눈꺼풀이 처진다.

그럼에도 일을 해야만 하고, 또 원하던 일을 하고 싶어서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버티고 있는 내게 “애는 어쩌고?”라는 물음은 가끔 힘빠지게 한다. 그 자리에 끼기 위해 나름대로 안간힘을 써온 처지가 들킨 것 같아 더 뾰족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실제로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을 수 있는) 궁금증을 던진 이들은 열의 아홉이 남성들이었고, 또 상당수는 아빠들이었다.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 묻지 않아도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게 가장 좋다”는 신화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직장맘을 향한 이중적인 시각을 여전히 체감한다. 일에 소홀하면 아이 핑계를 대고 일을 게을리한다는 류의 비아냥을, 그렇다고 일에 매몰되면 엄마로서의 자세가 글렀음을 지적받는다. 가뜩이나 아이 한 명 별 탈 없이 키우기 위해 하루하루 많은 사람에게 굽신거리며 겨우 버티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발을 디디고 있는 사회에서조차 나는 온전히 나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연속이다. 이렇게 줄 위에 서있는 나나, 줄에 서기를 기다리고 있는 후배들에게나, 아이를 낳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나라가 망할 것같이 외치는 소수점이나 아이를 낳으면 주겠다는 10만 원 같은 것들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지나듯이 그저 스쳐갈 뿐이다.

 

허백윤 님은 서울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직접 겪은 육아휴직 중의 이야기를 모은 책 <독박육아>의 저자입니다.

 

화면해설
이 글에는 거대한 노리개 젖꼭지를 힘겹게 끌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쓰는 엄마 앞으로 아빠들은 아무 것도 매달지 않고 혼자 홀가분하게 힘껏 앞으로 달려나가는 그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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