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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리고 지금 [2018.08] 노동자 인권과 노동 운동의 역사를 되짚다 - 구로 노동자생활체험관

글 박보라 사진 봉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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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신화는 한 개인이 아니라 공단에서 밤새도록 일했던 소녀들이 만들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결과가 묻어두었던 구로공단 노동자의 삶을 이제라도 돌아보기 위해 구로 노동자생활체험관을 찾았다.

 

여공들의 일상을 재현한 체험관

구로공단은 수출산업단지개발조성법에 따라 공장이 밀집된 지역으로 현재의 구로동과 가산동 일대를 말한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3개 단지로 조성됐으며 정부의 수출 주도 정책에 힘입어 1970년대 경제를 고도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봉제, 가발, 완구 등 저임금에 기초한 노동 집약적 경공업이 터를 잡았고, 한때 구로공단에서만 국내 총수출액의 10%를 달성하기도 했다. 노동력 수요가 늘어나면서 추후에 ‘공순이’로 불릴 어린 소녀들이 구로공단으로 상경하게 됐다. 이 주변에 노동자들이 주거하는 주거지가 만들어졌는데, 좁은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고 하여 속칭 ‘벌집촌’으로 불렸다.

‘공순이’란 명칭은 당시 한국 경제를 견인했다는 점에서 고마운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차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어린 여공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착취와 폭행, 탄압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낮은 임금으로 경제적 능력도 매우 낮았다. 낮은 월급으로 사글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2평(약 7㎡) 남짓한 방에 보통 세 명이 함께 살았다. 2층 양옥인데 방이 서른일곱 개나 있는 집도 있었다. 철제 프레임에 비닐을 씌운 ‘비키니장’을 하나 들여놓기라도 하면 잠을 잘 때 요리조리 엉키거나 칼잠을 자야 했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엔 이 벌집촌을 재현한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이 있다. 대한민국 산업화에 기여하고 노동자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애썼던 여공들의 공로를 기념하고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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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보장받지 못해 비참했던

1970년대 여공들은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상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공들의 50% 이상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고 대부분 가난했다. 돈도 벌고 야학에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울에 왔으나 당시 정부가 선전했던 성공 신화와 실제 생활은 달랐다. 비참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날이 이어졌고, 여공들이 많이 모였던 봉제공장엔 먼지가 가득해 늘 호흡기 질환에 시달렸다. 일부 기업주들은 밤샘 작업을 시키기도 했는데, 졸면서 일하면 생산성이 낮아질까 봐 잠 안 오는 약을 피로회복제로 속이고 주기도 했다. 공장의 매출이 몇십 억대가 넘어도 17세 여공은 한 달에 2만 2,000원 정도를 급여로 받았다. 사글세를 내고, 식비와 교통비를 내면 고작 1,000원이 수중에 남았다. 그것도 구로공단에 처음 들어가면 견습생이라 1만 원을 임금으로 받았다. 이런 식으론 고향집에 돈을 보낼 수도 없고, 야학에 다닐 수도 없었다. 일을 오래 하면 급여가 오르긴 했지만, 돈을 많이 주기 싫은 기업주는 숙련된 여공을 해고하고 다시 견습공을 채용해 인력을 보충했다. 집에 월급을 보내려면 공장까지 걸어가고 밥을 굶는 수밖에 없었다.

급여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여공들이 공장에서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바로 ‘몸수색’. 작업장에 있는 물건 중 밖으로 ‘빼돌리는’ 제품이 있지는 않을지 걱정한 사업주들이 퇴근하는 여공들을 대상으로 수위실에서 몸수색을 하도록 지시했다. 관리자는 상의에서 하의까지 손으로 몸을 더듬어 훔친 물건이 없는 것을 확인했고 이는 남자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외부에서 보이지도 않는 꽉 막힌 수위실, 그 안에서 구로공단 여공들은 매일 몸수색을 당했다. 여공들의 비참함은 그들이 살았던 집으로까지 이어졌다. 좁은 집에 수십 명이 기거하는 벌집촌 특성상 절도와 성폭력을 늘 경계해야 했고 화재나 연탄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하면 대피하기도 힘들었다.

노동자생활체험관에 재현된 쪽방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하는 장소가 아니다. 노동자를 바라보는 당시 사회를 반성하고 개발이란 휘황 아래 짓밟힌 인권을 돌아보는 곳이다.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권리를 위해 싸우다 가난한 집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계처럼 살았던 당시 노동자들에게 인권, 감정이란 단어는 사치였다. 기계처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했다.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분노는 사회를 향하게 됐고 많은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공장에서 기계만 돌리던 노동자들은 차츰 사회의 모순과 거짓말을 알게 되었고 마음을 모아 민주노조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가 사회단체나 종교단체, 도시산업선교회로부터 조언과 도움을 받아 단체를 조직하는 시기였다면 198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투쟁이 이어졌다.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마땅한 권리를 말할 뿐이었지만 그걸 쟁취하는 건 쉽지 않았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동자의 구호는 군사 정권의 강한 권력 앞에 힘없이 스러졌고 “노동자를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독재정권과는 한 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노동자 연대투쟁 선언문은 구속과 폭행, 블랙리스트로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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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대투쟁으로 얻어낸 민주노조운동

1984년 구로 지역에선 대우어패럴 등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노조를 결성하고 나자 회사의 노동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럴수록 노조를 지키려는 조합원들의 저항도 격렬해졌다. 대우어패럴 측에선 회유와 협박 그리고 폭행과 감금을 불사하며 노조를 해체하려 했으나 준법 투쟁을 고수했던 노조를 이길 수는 없었다. 노조는 회사의 불법 탄압을 여론화했다. 언론과 대중의 지지를 얻은 노조는 성공적으로 협상에 이르게 됐다. 이러한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발생하면서 1987년 7월, 전국 전 업종에 걸쳐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파업투쟁을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다. 그 여름 내내 수천 건에 달하는 자발적 파업이 이어졌다. 소기업, 대기업을 가리지 않았다. 어용노조를 해체하고 민주노조를 쟁취하려고 싸웠고 노동조합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파업을 한 주체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노동자, 대중 스스로 시작한 움직임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결과 ‘민주노조운동’이란 새로운 노동운동이 시작됐다. 대중 파업이 점점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어용 노조에 의해 지배되어오던 노사 관계를 변화시켰고,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사회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이 자리 잡게 됐다. 노동자를 억압하면서 지배하려다간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킬 수도 없고 자본주의 자체도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정권의 반성도 이끌어냈다.

지난 6월, 우리는 지방선거를 치렀다. 후보자들은 젊은 세대, 실버 세대에 가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사실 요즘 청년들 사이에선 영혼을 팔아서라도 직장을 구하고 싶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만큼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을 구했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회사는 성장하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망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엔 재계약 여부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게 되는 나쁜 일자리도 참 많다.

2016년 5월, 열아홉 청년이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다 열차에 치어 생을 안타깝게 마감했다. 누군가가 위험한 일을 비정규직에 넘겼고, 그 청년이 그 위험한 일을 해야 했다. 노동자가 사회에서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1970~80년대로부터 30~40년이 지난 지금, 그 시대의 노동자 인권과 노동 운동을 다시 살펴보면서 현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회로부터 노동자가 받는 처우가 그 사회의 건강함을 드러내는 척도라면, 2018년 현재는 30년 후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여공들의 벌집촌을 소재로 한 신경숙의 소설 <외딴 방> 중

“거기였다.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한, 우리들의 외딴방. … 왜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에, 우리들,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인지.”

 

화면해설
이 글에는 구로노동자 생활 체험관의 여러 풍경 사진이 있습니다. 여공들의 숙소인 벌집촌에서 여러명이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거나 기다리고 있는 그림, 좁은 방에 여러명이 함께 사는 모습, 어둡고 좁은 골목 등의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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