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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사람 [2018.10] 절망 속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 앨빈 브론슈타인

인권 편집부

 

앨빈 브론슈타인

 

 

폭염으로 온열 질환자와 사망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한 올 여름. 폭염 속 재소자들의 이야기가 보도되며 교도소 내 에어컨 설치가 논란이 되었다. 에어컨 설치를 제발 철회해 달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평생을 재소자 인권을 위해 싸웠던 앨빈 브론슈타인이 이 논란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불의를 발견하는 감각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미국 교도소가 배경인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는 간수가 재소자를 폭행해 불구를 만들고, 상황을 조작해 살해한다. ‘저 시절 교도소는 인권이란게 아예 없었구나’ 싶었는데 문제는 당시 다른 미국 교도소 상황에 비교하면 쇼생크는 호텔급 환경이었다는 데 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국가 교도소 프로젝트(NPP: National Prison Project)를 1972년부터 1996년 명예이사가 될 때까지 이끈 앨빈 브론슈타인은 1928년 미국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버지로부터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1951년 법학 학위를 받고 인권운동을 시작한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불의가 저지른 일들에 대해 듣고, 그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고 나면 그 이후엔 보고 듣는 곳에서 불의를 발견하는 감각이 생깁니다.”

그 ‘불의를 발견하는 감각’ 때문에 어느 날은 집 현관에 붙어 있는 “클랜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KKK단의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1960년대에, 그것도 미국 남부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석방과 투표권 시위에 참가해 체포된 이들의 보석을 신청한 백인 변호사에게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건 인생을 변화시키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했던 전통적인 변호사 업무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걸 알았죠.”

그는 1995년 <인콰이어러>와의 인터뷰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법률상으로나마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제정된 후, 그의 인생을 잡아당긴 것은 교도소의 상황이었다.

 

벌 받는 사람들

“재소자의 방은 ‘개집’에 가까웠습니다. 3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창문도 없는 공간에 7 명이 있었어요.”

변기 위에서 자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다 당시 재소자들은 푸에르토리코인과 흑인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환경에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없었다. 1971년, 뉴욕 아티카 주립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200여 명의 죄수가 간수들을 인질로 잡고 ‘일주일에 한 번은 샤워를 하게 해달라, 한 달에 1개 지급되는 화장실 휴지 배급을 늘려달라’ 같은 요구 사항을 외쳤다. 점거 나흘째, 무력 진압이 시작되었고 43명이 사망했다.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 사격을 한 결과였다.

브론슈타인은 아티카 폭동 다음 해 NPP를 설립했다. NPP는 미 연방정부와 주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벌이며 재소자 인권 보호 및 법률과 제도 개선운동에 앞장섰다. 1979년에는 교도소의 엉터리 치료로 전신이 마비된 재소자를 대리해 버지니아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당시 재소자 배상금으로는 사상 최고액인 51만 8,000달러를 받아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범죄자에게 돈을 벌어주는 것이냐는 비판이 안 나왔을 리 없다.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개인이 저지른 불의와 국가가 저지른 불의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에 걸친 그의 노력으로 미국의 교도소 시스템은 크게 변했다. 인권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라면 재소자에게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을 보장해야 하며, 가장 힘없는 자를 지키는 것이 사회를 지키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 덕분이었다.

“폭압은 힘센 자가 아니라 가장 힘없는 이들부터 짓밟고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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