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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수첩 [2018.10] ① 408+297일, ‘마음은 굴뚝같지만’

글 송경동

 

 굴뚝

 

2016년 겨울 광화문 박근혜 퇴진 캠핑촌의 아침. 마을천막으로 가면 밤새 언 몸을 히터 앞에 녹이러 나온 파인텍 해고노동자 박준호와 홍기탁, 차광호, 김옥배가 있었다. 서로 정신없는 광장의 하루를 보내고 저녁 늦은 시간이면 다시 마을천막에서 모이기도 했다. 어둔 조명 아래에서 김치 한 쪼가리 두고 컵라면에 서로 말없이 숟가락을 담그기도 했다.

 

촛불광장의 기억 속 그들

“행님요.” 때론 아무런 힘도 없는 나를 두고 눈시울이 젖기도 하던 친구들. 나보다 훨씬 견결하게 살아온 그들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행님요”하며 물기 젖은 음성으로 어떤 생의 그리움에 대해 말하려 할 때마다 끝없는 사막을 혼자 걷거나 수천 개의 강을 건너야 하는 이라도 된 듯 아득해지곤 했다.

단언컨대 그들은 그해 겨울 촛불광장의 한복판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헐벗은 채로 싸웠던 이들이었다. ‘꽃도 무덤도 어떤 영예도’ 없는 길이어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촛불혁명이 실패해 얼마 전 밝혀진 대로 박근혜가 공권력이나 보수집회를 동원하고, 쿠데타로 반격해온다면 우린 도망칠 곳도 없이 제1번 타깃이 되어 죽겠다는 각오들이기도 했다. 만약이라도 그런 상황이 정말 온다면 캠핑촌에 남을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일까. 그때마다 난 왠지 파인텍 해고노동자들의 순박하고, 바보스러울 만큼 우직하고, 고집스런 얼굴들이 아프게 떠오르곤 했다. 5·18 당시 도청에 남았던 이들도 그런 헐벗은 이들이었지. 이제 와 이야기지만 그들은 실제 각오를 하고 있기도 했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결을 20여 일 남겨놓고 있었을 때부터 파인텍 해고노동자들과 캠핑촌 입주 작가였던 최병수 작가가 광장 한 켠에 한반도 지도 모양의 거대한 철제 조각물 조립 작업을 시작했다. 8톤 트럭으로 두 대 분의 고철이 들어왔다. 발판을 엮어 올라가던 그 철제 조각물은 작품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박근혜 파면이 인용되지 않고 격돌이 일어날 시 그들이 올라가기를 결심한 ‘망루’였다.

그렇게 촛불항쟁의 최전선에서 박근혜를 쫓아내는 데 함께했던 그들이 2017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던 날 새벽 다시 목숨을 걸고 서울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75m 굴뚝에 올라가 있다. 오늘(9월 5일)로 408+297일째다. 앞의 408일은 2014년 5월 27일부터 2015년 7월 8일까지 경상북도 구미의 문 닫힌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 위에서 차광호 조합원이 혼자 견뎌야 했던 고공농성일이고, 뒤의 297일은 현재 서울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75m 굴뚝 위에서 진행 중인 고공농성일 숫자다. 그들의 고공농성일을 세는 셈법이다. 그들은 무려 2년을 하늘 위에서 보내고 있다.

 

그들은 왜 굴뚝에 올랐나

시작은 2006년부터였다. 그들이 청춘을 바쳐 일하던 구미공단의 대표적인 사업체 한국합섬이 일방적인 정리해고 후 공장 문을 닫자 5년에 걸쳐 문 닫힌 공장을 지키며 법정관리 주체인 산업은행 등에 맞서 싸워야 했다.

스타케미칼은 남아 있는 조합원들에 대한 고용 승계, 노동조합 승계, 단체협약 승계, 그리고 공장 운영의 정상화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수많은 정리해고 사업장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요구가 관철된 곳은 한국합섬이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묻고 그간 일해온 노동자들의 고용 등 여타 권리가 기본적으로 먼저 지켜져야 한다는 상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피눈물로 싸운 5년이었다. 당시 그들의 복직 소식은 항시적인 고용불안, 정리해고 후 불안정노동-비정규직화라는 위협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 노동자와 그 가족 모두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안기는 참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타케미칼의 모기업인 스타플렉스 김세권 사장의 목적은 공장의 정상운영이 아니었다. 2년도 채 안 돼 정리해고 후 위장폐업의 수순을 밟았다. 알짜배기 공장 부지를 분할매각하고 기술과 설비를 이전·처분하려는 계획이었다.

한국합섬 시절부터 긴 싸움에 지친 당시 노조 집행부는 부당한 정리해고와 명퇴에 도장을 찍어주고 말았다. 많은 동료가 몇 개월치 위로금을 받고 싸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진실과 정의를 다시 바로 세우겠다는 ‘바보’들이 다시 오늘까지 눈물겨운 사회적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막막한 싸움을 하던 2014년 5월 27일, 더 이상 평지에선 갈 곳이 없던 해고자 차광호가 단독으로 하늘에 올랐다. 폐허가 된 공장의 45m 굴뚝 위였다. 혼자 그곳을 오른 차광호가 앞의 숫자, 408일이라는 야만의 시간을 버텨야 했다.

굴뚝 아래는 경찰들이 진을 치고 밥을 올리는 것 외 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차광호는 원시인의 몰골로 408일을 혼자 버텼다. 기네스북에 오를 기록이라고 했다. 인간의 시간을 넘어버린 초인의 시간 앞에 사회적 관심들이 집중되자 사측도 교섭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2015년 7월 8일, 파인텍이라는 자회사를 신설해 고용과 노동조합 및 단체협약을 승계한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그가 내려왔다.

하지만 약속은 다시 오래가지 않았다. 충청남도 아산에 공장 가건물 한쪽을 세내어 졸속으로 만든 자회사 ‘파인텍’은 모양만 회사였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인 구미에서 격리된 강제수용소 같은 굴욕적인 생활이었다. 합의서에 명시된 임금은 ‘최저임금(6,030원)+1,000원’, 하루 8시간 근무 외에 야근이나 잔업은 주어지지 않아 세금과 4대 보험료 등을 떼면 월 실수령액이 120여만 원이었다. 어떤 진정성도 없이 굴뚝농성을 해제시키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음이 금세 확인되었다.

단체협약 준수 등 최소한의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의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웃음과 나몰라라, 알아서들 해봐라, 배 째라였다. 다시 갈 곳이 없는 그들은 또 한 번 하늘로 올라야 했다. 지난겨울엔 영하 10℃ 이하의 추위를 견뎌야 했고, 지금은 110여 년만의 폭염이라는 지옥을 버티고 있다.

 

농성장

 

우리, 함께 살자

이런 야만의 시간이 언제나 끝날 수 있을까. 모회사인 스타플렉스는 마지막 남은 해고자 여섯 명을 고용할 수 있는 충분한 자본 능력과 공장도 갖추고 있다. 고용과 노조와 단체협약 인정, 그리고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라는 두 번의 약속도 있었기에 다른 까닭도 없는 듯하다.

있다면 기계나 노예가 아닌 인간이기를 바라는 노동자들이 싫은 게 아닐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인 단결권과 단체행동권과 단체교섭권을 요구하는, 고용에 대한 기업주의 책임을 묻고 요구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노동자들이 싫을 뿐이다. 기업주의 제왕적 특권과 독점에 저항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싫을 뿐이다.

그런 오늘의 야만에 맞서 그들이 올라가 있는 굴뚝은 우리 사회 정의의 현재를 가늠하는 75m짜리 거대한 온도계일 수 있다. 그들의 물음을 폭염 속 굴뚝에 내버려두고 대한민국 인권의 온도를 잴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는 건설되기 힘들 것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촛불정부의 국정 목표 역시 온전하기 힘들 것이다. ‘함께 살자’는 오래된 외침이 너무 오래 방치되지 않기를 소망해본다. 현재 ‘굴뚝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외로운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촛불혁명 원년인 2017년의 마지막 날이던 지난해 12월 30일에는 국회에서 굴뚝 농성장까지 촛불시민들이 행진에 나서주기도 했다. 얼마 전엔 다시 시민들이 모여 뙤약볕을 뚫고 굴뚝에서 청와대까지 오체투지 행진도 함께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이라는 사회적 참여 캠페인도 시민들에 의해 진행 중이다. 굴뚝우체통이 만들어져 이 세상에 없는 주소지를 향해 의로운 편지들이 전달되고 있기도 하다. 촛불항쟁을 통해 박근혜라는 특권과 독재, 친재벌, 반민주를 끌어낸 데 앞장선 그들이 또 다른 정의 하나를 바로 세우고, 이제 그만 이 평지로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기를 간절히 꿈꿔본다.

“행님요. 걱정 마이소. 박근혜도 쫓아낸 우리 아닌교.”
여전히 씩씩한 그들의 우직한 말이 눈물겹다.

 

송경동 님은 ‘천상병문학상’, ‘신동엽문학상’, ‘5·18들불상’ 등 수상한 시인입니다. 투쟁이 있는 여러 삶의 현장에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거리의 시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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