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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리고 지금 [2018.10] 잊히는 이름,위안부 -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글 최준석 사진 박영주

 

그림

 

1990년을 전후하여 우리는 낯선 이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중국, 일본,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필리핀, 심지어 적도 근처의 티모르 섬에서까지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다가 제2차 대전의 종결과 함께 돌아왔거나 남아 있는 그들 모두, 자신의 삶의 일부를 지우고 살아야 했다.
우리는 그들을 명명할 줄도 몰랐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45년이 지날 즈음, 우리는 우리 앞에 나타난 이웃을 보았다. 위안부.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1990년대 이전에도 위안부 문제는 몇몇 곳에서 제기되었다. 한국 내에서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1970년대에 <조선해협>1), <머나먼 여로>, <빨간 기와집> 2), <전쟁의 책임을 호소한다> 등 주로 양심적 지식인이나 르포 작가들에 의해 강제 징용자와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증언과 삶을 담은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1985년 임종국 선생의 <정신대 실록>이라는 책이 나오기는 했으나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는 정도였다.

1980년대 말 일본인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벌이던 여성운동계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후 1991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결성이 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유엔 등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국내적으로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 사이 일본 정부는 정신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민간업자들이 데리고 있었다거나, 또는 자발적인 매춘으로 돈을 벌었다거나 혹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보상에 관한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등의 망언을 늘어놓았다.

 

1) 강제 연행된 정정모의 일대기를 다룬 일본 르포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책. 하야시 에이다이는 조선인 강제 연행에 관한 책을 20여 권이나 썼으며 ‘내 조상이 아마 조선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농담을 자주 했다고 한다.
2) 가와다 후미코의 책, 일본 오키나와에 거주 중인 조선인 배봉기 할머니를 취재하고 쓴 책이다. 배봉기 할머니는 1975년 한국인 최초로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빨간 기와집은 배봉기 할머니가 있었던 위안소를 이르는 말이다.

 

전시사진

 

관부(關釜)3) 재판의 시작

1991년 8월 14일 서울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밝힌 이래, 부산에서도 같은 해 10월 19일 부산 여성의 전화에 위안부 피해 신고전화가 설치되었다. 처음 신고전화를 개설했을 때 의외로 신고전화의 90% 가까이가 남성이었다. 물론 전쟁 중인데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어깃장을 놓는 사람도 있었지만, 위안소에 드나들었다는 남성, 직접 위안부 사냥을 했다는 전 헌병, 전 군의관, 간호사, 위생병 등 다양한 이들의 전화가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신고는 기대만큼 활발하지 못했다.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이귀분 할머니의 신고가 있기는 했지만 정작 위안부 피해자들은 더 꽁꽁 숨었다. 그러던 중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에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문서가 발견되고, 서울에서는 영희초등학교에서 보관 중이던 문서에서 광복 전 방산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정신대로 출발한 날짜, 장소, 동원 경위, 설득 과정 등이 담긴 생활기록부가 발견되었다. 동시에 일제강점기 방산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케다의 증언이 나오면서 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부산 정대협에도 피해 당사자의 신고 전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순녀 할머니를 필두로 박두리, 이순덕 할머니의 신고가 봄까지 이어졌다. 이후 정부도 겨우 움직이기 시작, 그해 2월 정부는 정신대 진상 규명의 일환으로 신고센터를 군·면 단위까지 확대하였다.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받은 정대협은 위안부를 ‘국제법상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전쟁범죄 및 인도에 관한 죄’로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유엔 인권위원회 등에 위안부 문제와 정신대 문제를 제기하여 유엔 인권위원회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조사하도록 권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법률 투쟁을 시작하였다.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와 군인군속 유족 32명이 도쿄 지방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1992년 12월 25일 부산에서는 박두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근로정신대 피해자 등 4명(추후 5명이 추가되어 원고가 9명이 된다.)이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일본 정부의 국회 및 유엔총회에서의 공식 사죄와 보상을 청구하는 ‘부산 군대위안부·여자정신대 공식사죄 및 배상청구소송’이라는 긴 이름의 소장을 제출하였다. 이것이 관부 재판의 시작이었다.

 

3)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釜山)을 오가며 진행한 재판이라 그렇게 불렀다.

 

전시관 내부

 

65개월, 23번의 재판, 26번의 방문

시모노세키에서의 재판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일본 정부의 교묘한 방해는 당연히 예상한 것이었다. 연로하신 할머니들이 매번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야 하는 육체적 괴로움도 있었지만, 법정 안팎에서 이어지는 일본 우익들의 모멸도 견뎌야 했다. 또한 국내에서도 여전히 위안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싸움은 물러설 수도 없었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이 재판을 이끈 소송단장은 김문숙 선생이었다.(올 봄에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를 통해 그 과정을 조금 엿볼 수 있다.) 김문숙 선생은 할머니들을 모시고 23번의 재판에 모두 참여하였으며, 재판을 준비하는 것까지 포함해 26번의 부산-시모노세키 간 배를 탔다. 그때마다 모두 자비를 털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물러서지 않는 김문숙 선생의 기질이 재판을 통해 잘 나타난다.

재판에서는 재일동포를 포함한 일본 변호사 13명이 기꺼이 할머니들을 도왔다. 그리고 약 200명의 일본인으로 구성된 후원 회원들이 재판 때마다 할머니들을 지원하였다. 자신들의 억울함과 분함을 조리 있게 설명하기도 힘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듣고 소장으로 정리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재판 때마다 참석하여 원고로서 삶의 모멸을 고스란히 재생해야 하는 할머니들의 고통은 상상하는 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더구나 1993년 4월 일본 정부는 해당 소송을 도쿄로 옮기라는 신청을 제출하였다. 재판에 참석하는 것을 어렵게 하여 쉬이 지치게 하거나 중단시키려는 목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변호인들과 후원회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의 재판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시모노세키에서는 후원 회원을 비롯해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재판을 전후하여 시위, 기자회견 등을 함께하였다. 도쿄의 ‘민간기금’ 사무실의 찾아가 항의 방문을 하다가 사무국장이 망언을 늘어놓자 이귀분 할머니는 사무국장의 멱살을 잡기도 하였다.

 

전시된 그림

 

 

새로운 시작, 민족과 여성 역사관

23번의 재판, 5년 5개월이 지난 후에 1심 재판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하여 일본의 국가배상책임 인정하여 위안부 피해자 3명에게 각 30만 엔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원고가 요구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법원에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번째 판결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알다시피 항소심, 상고심에서는 결국 배상 책임마저 인정되지 않았다. 소송은 최종적으로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모두 종결되었다.

6년 가까이 시모노세키 재판을 이끌어온 김문숙 선생은 이후 다른 결심을 한다. 정부든 국민이든 조국이 먼저 달라져야 했다. 교육이 우선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2004년 그가 사재를 털어 세운 것이 ‘민족과 여성 역사관’이다.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역사관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관에는 일본군 위안소 당시의 자료와 위안부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100장, 위안부 문제를 다룬 서적 200여 권, 신문기사와 영상물 등 1,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관은 매년 주제를 정해 그에 맞는 자료로 구성해왔다. 그리고 제3전시관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술 심리 치료를 통해 그린 작품들을 전시했다.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 강덕경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 <사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몇 년 전부터 역사관은 재정난에 빠져 있다. 지금까지의 운영이 거의 모두 김문숙 선생의 사재에 의존해왔기에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김문숙 선생은 몇 년 전 역사관의 운영 중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다 시민들의 후원으로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으나 매년 운영의 어려움에 봉착한다고 했다. 작년 부산시에서 천여만 원의 재정 지원이 있었으나 이마저 사업비에 치중되어 있기에 실제 운영은 늘 위기에 닥쳐 있다. 얼마 전부터 자원봉사자들이 정기 후원을 모집하는 구상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폐쇄와 유지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위에 있을 뿐이다. 김문숙 선생은 궁극적으로 부산시나 공공기관에서 역사관을 맡아 운영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위안부 기록물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후세들에게 그리고 세계 사람들에게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로 기억되는 것이다. 아픈 역사가 잊히는 순간, 사람들도 잊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잊히면 모든 것이 잊히기 때문이다.

 

 

최준석 님은 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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