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 > 돌아보기 > ② 유럽의 선행을 통해 알아가는 내 몸을 지킬 권리,
낙태는 나의 선택이다

돌아보기 [2018.11] ② 유럽의 선행을 통해 알아가는 내 몸을 지킬 권리,
낙태는 나의 선택이다

글 김희정, 사진 봉재석

 

-

 

 

 

「유럽낙태여행」 이민경 작가를 만나 낙태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

우리는 전 세계 인류의 일원이자 여성으로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장이 어떤 식으로 묵살당해 왔는지 알지 못한다. 직접 가서 보고 듣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이야기들. 네덜란드 여성 운동가인 레베카 곰퍼츠, 프랑스의 낙태 합법화를 이끈 정치인 故 시몬 베이유, 아일랜드의 낙태 국민투표 논란, 폴란드의 검은 시위, 루마니아 낙태금지법 철폐 등을 화두로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 ‘낙태죄 폐지’를 조명한다.

 

권리를 외칠 의무, 개혁의 여지

「유럽낙태여행」 책 제목을 보고 화를 내는 남자들이 있다고 한다. 딱 꼬집어 이유를 설명할 순 없어도 아마 본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그편이 더 이상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본질적 억압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임신중단권이 억압받아 온 건 자명한 사실. 선진 문화권이라고 생각했던 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프랑스는 여성들이 가부장제와 맞서 싸워 이긴 나라로, 피임조차 금지했던 과거로부터 낙태 합법화를 투쟁으로 얻어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프랑스인들이 콘돔 사용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콘돔’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보수적 사고방식을 지녔다. 낙태권을 합법으로 만든 자발적인 국민들이 가진 의외의 양면성이다.

재생산권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네덜란드는 다를까? 기대는 더 큰 실망을 안긴다. 프랑스 운동가가 유토피아라며 부러워한 네덜란드의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낙태가 합법인 나라인데, 중심도시인 암스테르담에 낙태병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낙태를 원하는 네덜란드 여성들은 몇 시간 거리의 낙태병원으로 이동해야 했다. 문을 닫는 병원도 부지기수. 법제화만 이뤄졌을 뿐 정작 여성들은 관심 없는 곳으로 내쳐졌다. 네덜란드 인권운동가 레베카 곰퍼츠는 “절대 이 나라를 롤모델로 삼지 말라”고 당부한다. 네덜란드는 기대를 배반했다. 생각지 못하게 반면교사의 나라가 됐다.

우리나라도 낙태죄가 화두에 올랐다. 현재 국민들은 노골적으로 싸우고 있다. 아직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 서로 다름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 우리에겐 긍정의 결과를 기대해볼 만한 여지가 있다. 진보의 선상에 있는 것이다.

 

-

 

 

 

양도될 수 없는 권리, 재생산권

얼마 전 “섹스를 했으면 책임지라”는 법무부 장관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이는 태아 생산에 초점이 있거나,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뺏고 싶은 잠재된 마음에서 비롯된 발언인가? 낙태죄가 폐지된다 해도 이런 식의 발상은 여성들에게 온전한 자유를 선사할 수 없다.

결국 낙태죄 폐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재생산권’으로의 궁극적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유럽의 선행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낙태죄 폐지를 최종 목표로 삼아선 안 된다.

국제 인권회의를 통해 논의돼 온 재생산권이란 신체적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출산과 성에 대한 양성평등권, 자녀 양육 등을 위한 공적 지원 요청권 등으로 구성되는 포괄적인 인권의 틀을 정의한다. 향후 낙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은 재생산권이라는 여성 인권의 관점에 근접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재생산권이란 정권이 바뀔 때면 손바닥 뒤집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외부 압력에 의해 재단돼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내 몸은 내 것이고,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돼야 하며, 나만이 제어할 수 있다. 낙태죄는 국력에 눈이 멀어 복종을 강요하는 국가의 독선이나 다름없다. 나라가 법으로 폭력을 휘둘러 개인의 몸을 제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

 

 

 

우리도 낙태하고 싶지 않다

원치 않는 임신이 발생하는 한 낙태는 불가분의 관계처럼 생겨날 수밖에 없다. 낙태를 규제하고 싶다면 낙태 이전에 원치 않는 임신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임신이 여성만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방도 책임도 여성이 짊어져야 한다면 그 또한 폭력이 된다. 나의 누이와 딸에게 벌어진 일이라고 가정해보자. 당연하게 “책임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나에게는 순리적인 권리가 왜 타인에게 엄격해야 하는지 고민해봐야 하는 지점이다.

이제 우리는 안전한 낙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다가올 미래의 낙태와 임신 출산 제도는 국가의 감찰이 아닌 교육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국가와 일부 남성들이 칭하는 0.5cm 정도의 태아 세포를 진정 살리고 싶다면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이면 된다. 콘돔 사용은 거부하면서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할 순 없다. 낙태를 제재하기 전에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성교육과 피임교육이 선행돼야 하며, 여성이 임신했을 때 임신 지속 및 종결 여부, 의료 건강 및 가족 관계에 대해 상담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낙태는 최후의 수단일 뿐,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없다. 최선의 방법은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이는 것이고, 그에 대한 교육과 실천이 수반돼야 한다. 나아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낙태는 행해지고 있다. 우리는 각자 무얼 반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낙태 반대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본인은 원치 않는 임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뿌리박힌 유교 사상이 발현된 것은 아닌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면 여성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책임질 수 있게 된다. 무책임하게 살인이라는 단어를 내뱉지 말고, 함께 고민하는 방법을 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 글에는 「유럽낙태여행」의 작가 이민경 님의 인터뷰 사진이 있습니다.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