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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다보기 [2018.11] 이웃집 괴물과 맞서기

글 최태섭

 

올 한 해를 돌아보자. 각계각층에서 터져 나온 성폭력 피해 고발에 쏟아진 저주 같은 조롱들, 퀴어퍼레이드를 막아선 혐오세력의 폭력과 적반하장의 가짜 뉴스, 내전의 불길을 피해온 예멘 난민들을 내쫓아달라고 모인 80만 건의 청원. 부패한 정권을 몰아내고 2명의 전직 대통령에게 법의 심판을 내린 이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풍경들이다. 왜 그토록 눈부시게 정의로웠던 우리 사회가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 앞에서는 발길을 돌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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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의 국제적 논쟁

본래 혐오와 차별은 다른 개념이다. 혐오가 어떤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라고 한다면, 차별은 누군가를 차등 대우하며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혐오와 차별은 자주 인과관계와 하나의 쌍처럼 작동한다. 혐오는 차별로 이어지고 차별은 혐오를 강화한다. 둘 다 다수가 소수에게,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점도 같다. 약자도 강자를 혐오하거나 차별할 수 있다는 주장이 존재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강자도 욕을 먹으면 기분이 나쁘다’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언가가 혐오와 차별이 되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사회적 실존을 위협하는가를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딜 여자가”라는 말은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게 제동을 거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어딜 남자가”라는 말은 그가 여자 화장실이나 탈의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 말고는 딱히 무언가를 가로막지 않는다. 혐오와 차별은 기울어져 있는 게임이다.

여기에 우려를 더하는 일이 생겼다. 이른바 ‘프로 혐오세력’의 대두다. 일부 보수 개신교와 극우 정치세력의 결합으로 알려진 이들은 소수자들에 대한 가짜 뉴스를 생산·유포하고, 소수자의 인권을 증진하는 법안이나 정책에 악성 민원을 넣고, 전국에서 열리는 퀴어퍼레이드를 쫓아다니며 행사 개최를 방해했다. 행동은 더 조직적으로 변했고 방법은 더 교묘해졌다. 이들에 동조하는 일부 정치세력과 정치인들도 지역구 교회가 아니라 국회에서 동성애를 막아야 한다고 외치고 여성 인권에 대한 망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민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국가의 관점은 지지율 앞에 흔들리는 중이다. 여성들의 피해 증언이 법 앞에서 힘을 잃거나 명예훼손의 역풍을 맞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물론 자신 혹은 다른 소수자들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혐오와 차별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면화되는 상황에 대한 경각심과 깊은 고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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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름을 대하는 자세

혐오는 무엇에서 기인할까? 혐오의 가장 원초적인 기원은 이질감이다. 나와 다른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 말이다. 이질감은 대상에 대한 무지를 통해 유지된다. 나에게 위협이 될지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는 존재와의 공존은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장 혐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질감은 관찰과 탐구 또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것과 공존하는 법을 익혀왔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과정이야말로 문명의 발전 과정이었다. 즉, 이질감이 혐오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들이 필요하다. 먼저 대상에 대한 불완전하고 왜곡된 지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나에게 끼치는 위협을 과장하고, 나중에는 나의 안녕에 큰 악영향을 끼치는 존재이며, 더 나아가서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대상에 대한 차별 조치들은 차별당하지 않는 이들에게 반사이익을 누리게 해줌으로써 혐오 행위를 강화한다. 단단하게 굳어진 혐오와 차별은 법과 관습만큼이나 뿌리 깊게 사회 안에 자리 잡는다.

이런 과정들은 우발적으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조장된다.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은 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쟁 상태에 있거나 대립 중인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거짓된 정보들과 혐오 표현들을 만들어낸 사례는 매우 많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내부의 적을 만들어 낼 때다. 공동체가 어려움에 빠지고 권력자들의 정당성이 흔들릴 때, 사회의 주변부에 있으면서 주류에 동화되지 못하는 개인과 집단들을 내부의 적으로 지목하는 것이다. 마녀, 유대인, 빨갱이, 유색인종, 동성애자, 떠돌이, 장애인, 병자 등이 그 적으로 지목됐다. 혐오와 차 별을 조장하는 이들은 저 내부의 적이 공동체가 빠진 어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그들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다시 좋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목된 이들은 원인을 제공하기는커녕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어려웠던 존재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선동은 때때로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답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을 단순히 악마에 홀린 선량한 사람들로 여기는 것도 곤란하다. 자신의 사회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든, 적으로 지목된 이들이 만만해 보여서든, 압박에 떠밀렸든 간에 각자가 책임져야 할 비겁함과 선택의 결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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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싸우는 사람들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자. 오늘날 한국 땅에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진 않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국가가 대놓고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정부는 소수자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대책 마련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 많은 이의 투쟁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너무 크다. 오늘날 혐오와 차별의 특징을 요약하면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사회적 특권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라 칭하고 그것을 빌미 삼아 차별 해소를 위한 소수자 잠정적 우대 조치를 반대한다. 나아가 차별을 일삼고 혐오를 발화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약자들마저 독이 올랐다. 모욕이 대화를 대체하고, 위악적이며 괴물 같은 태도와 말들이 경쟁하듯 난무한다. 헬조선 2.0은 촛불과 함께 불타올랐던 희망이 거대한 실망과 절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물론 이 가운데에서도 혐오에 맞서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한 채 활동하고 있고, 혐오세력과의 싸움에서 받는 상처는 개인의 몫으로 남았다. 더 굳건한 연대와 사회적 지원, 제도적 보완이 시급한 상황이다. 혐오 자체와 맞서는 싸움도 중요하지만 그 원인들을 해소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름이 차별받지 않도록,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생존이 경쟁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가 되도록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자멸을 택하는 최초의 종이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위태로운 마음과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태섭 님은 칼럼니스트이자 사회학자이며, 최근 발간된 저서로는 「한국, 남자」가 있습니다.

 

 

이 글에는 강아지와 함께 걸어가는 여성, 노인, 신체장애인, 흑인,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는 남성 등이 가운데 모여있고, 많은 사람이 그들을 에워싸고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림,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 주변으로 수많은 점이 마치 공격하듯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 사람 하나하나는 힘이 없으나 모여서 함께 하면 강한 힘을 갖게되는 걸 의미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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