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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의 인권위원회 [2018.12] 관심은 곧 응원입니다

글 이지은, 사진 부산퀴어축제 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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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는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슬로건을 떠올리며 어느 대상까지 ‘모든’에 포함되는지, ‘사람답게’라는 건 어떤 모습인지 생각하곤 한다. 부끄럽지만 잔학한 범죄자나 뻔뻔한 정치인을 뉴스에서 보는 날이면 모든 사람의 범주는 여지없이 좁아지고 교황의 방문 즈음에는 한없이 넓어져 이미 죽은 이나 태어날 이도 권리의 주체로 포섭되곤 했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지난여름, 지역의 작은 공부 모임에서 만난 그녀가 헤어질 때 했던 말이 있다. 무척 담백한 표정과 어투로 “당신이 와 주면 그것만으로 곧 힘이 되니 꼭 다시 만나자”고.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 직원으로 요구와 질책 그리고 변명에 익숙했던 나는 어디서도 듣기 어려웠던 호사스러운 말에 어설픈 미소를 짓다가 담담한 모습에 눈두덩이 시큰해졌다.

‘편견을 깨는 강좌’의 초대 손님인 그녀와 남편은 평소에도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고 자녀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라게 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남자로 살고 싶다’는 딸(이젠 아들인) 앞에서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있는 그대로’라는 다짐 속에는 성 정체성이란 항목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들은 권위적이지 않은 부모로서 열린 관점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왔던 자신들이 부끄러웠고, 혼자 고민했을 아이의 수많은 밤을 떠올리자 몹시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에는 성별을 바꾸는 수술과 법적인 서류 준비도 가족 모두가 나서 적극적으로 도왔다.

부부는 모든 절차를 끝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아들을 보자, 벽장 속에 숨어있는 다른 성소수자 청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열심히 참석 중인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는 정작 부모가 아닌 성소수자 당사자도 많이 나오고 있다. 친 가족에게는 하지 못한 말과 응원을 모임을 통해 서로에게 전달하고, 언젠가 하게 될 커밍아웃을 준비하기 위해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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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지킴이 지역 인권사무소

“퀴어축제 때 꼭 뵙겠다” 말하고 돌아섰는데, 연이어 터지는 대구, 인천, 제주 지역의 소식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과연 축제의 장에서 웃으며 그녀를 만날 수 있으려나…. 생각이 많아지는 몇 달이었다.

개인적인 감상과 관계없이 문턱 낮은 인권 옹호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 지역 인권사무소다. 그러니 기본권이 침해되거나 정당한 권리 주장이 방해받을 것으로 우려되는 인권 현장을 모니터링하고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인권 침해를 예방하는 노력은 사무소의 매우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성소수자들이 축제 형식을 빌려 자신을 드러내고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하는 ‘퀴어문화축제’가 해운대 일대에서(해운대 앞 구남로 일직선 광장) 진행된다고 했다. 동시에 이성애의 당위성과 퀴어축제의 유해성을 주장하는 ‘레알 러브 시민축제’가 같은 날 같은 구역에서 운명처럼 마주 서게 됐다. 태풍으로 두 축제의 일정이 일주일 연기된 가운데 긴장감은 나날이 커져 갔다. 이에 부산인권사무소는 당초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홍보하는 부스 운영 계획을 포기했다. 그리고 인권지킴이단으로서 현장을 뛰어다니며 모니터링 하기로 했다. 경찰 측에도 양쪽 시민 모두 적극적으로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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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축제가 남긴 메시지

지난 10월 13일 토요일 이른 아침,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양 축제장을 오가던 우리 지킴이단은 막상 축제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2천 명이 넘는 경찰 인력이 두 축제장을 분리해 완충지대를 두고 있었고, 멀리서나마 서로 마주한 무대는 각자의 문화 공연에 충실했다. 대다수의 참여자는 상대를 방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더 설득력 있게 말하기에 바빴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퍼레이드 또한 출발 전부터 서로의 구역을 지키고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대체로 그렇게 진행됐다.

아무래도 시민 대 시민의 충돌이 우려되는 만큼 우리는 경찰 등의 공권력이 예방적이고 돌발 상황에도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봤다. 혐오 발언을 하거나 허가 없는 촬영을 시도하는 이들이 나타날 때마다 ‘대화 경찰’이 빠르게 나타났다. 현재의 행동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리고 자제를 요청하자 대부분은 수긍하고 자리를 옮겼다. 공격의 대상이 된 이들도 이 같은 모습이 몇 차례 반복되자 대응하지 않고 경찰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큰 충돌 없이 양측의 퍼레이드가 끝났다.

수천 명의 인파가 사라진 후 해운대구청 앞에서 작은 집회가 열렸다. 일주일 뒤 개최될 광주 지역 퀴어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까지, 전국 7개 지역의 기획자들은 그동안 장소 허가나 준비 같은 운영상의 문제로 동분서주했으며, 축제가 끝난 뒤 각종 고소고발로 불안정한 삶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축제장에서 마주한 혐오 발언과 증오의 표정, 물리적 위협은 아주 오랜 기간 상처로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힘이 된다는 꽤나 아픈 이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앞서 얘기한 성소수자 부모에게서 한 번, 성소수자 단체 활동가로부터 또 한 번. 성적 지향을 비롯해 19개 항목이나 되는 차별 금지 사유를 법으로 가진 국가인권위원회가 어찌 옆에 있기만 해서 되겠는가. 지금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

 

이지은 님은 부산인권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는 축제장에서 퀴어를 상징하는 커다란 무지개 깃발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 퀴어문화축제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 무대에 올라서 공연하는 사람들의 사진과,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세계가 함께 외치는 구호, Standup For HumanRights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엠블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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