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 > 그때 그리고 지금 > 청년 전태일의 값진 희생
노동시장에 경종은 울렸나
평화시장 전태일 길

그때 그리고 지금 [2018.12] 청년 전태일의 값진 희생
노동시장에 경종은 울렸나
평화시장 전태일 길

글 박보라, 사진 봉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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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노동자 전태일. 그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빨리 출세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그의 일기나 편지를 살펴보면 가혹했던 노동 현실과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결국 험준한 노동 현실에 분노하던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투쟁하다 분신했다. 죽음으로써 한국 사회를 깨운 전태일 열사. 그의 삶과 투쟁을 들여다본다.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아이론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사나이 큰 포부를 가지고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지만 정히 못 견디겠다.”
전태일 일기 중 _ 196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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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이 곧 희망으로 이어진다면

전태일은 1948년 8월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전쟁 후 서울에 올라와 살았는데, 당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동대문시장에서 잡일을 하며 어머니와 두 동생의 생계를 책임졌다. 17세가 되던 해, 그는 평화시장의 학생복 제조업체에 취직했다. 타고난 손재주로 열심히 일했던 전태일은 동료 견습공들보다 일찍 재봉사가 됐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차츰 어렵고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해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가 일하던 공장에는 종업원이 30명쯤 있었는데 거의 여자아이들이었다. 19~20세 정도 된 소녀들은 미싱사, 14~18세 정도 된 아이들은 견습공이다. 견습공은 3~4년 정도 일해야 겨우 미싱을 밟을 수 있다. 창문도 없는 찜통 같은 곳. 허리를 제대로 펼 수도 없는 작은 공간에서 14시간씩 먼지를 뒤집어쓰며 일했다. 소녀들의 꿈은 미싱사였지만 정작 미싱사가 돼도 호흡기 질환으로 병에 걸려 죽거나 평생 누워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소녀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엄청난 작업과 폭언·폭행에 시달리며 일하는 것을 전태일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한창 공부하고 부모에게 사랑받을 또래의 아이들이 너무 가혹하게 사는 것 같았다.

전태일은 뒤늦게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았다. 동료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이 노동 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애썼다.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를 조사해 노동청에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도 보냈다. 1969년 11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법적인 노동환경에 대해 알리고 노동자들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보내지는 못했지만. 정부는 전태일과 바보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는 노동자의 권리보다 경제 성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시대였기 때문에. 결국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경찰의 제지로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그 순간, 전태일은 분신 항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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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양심, 우리들의 영웅

동대문역 1번 출구. 흥인지문을 바라보고 쭉 걸어가다 보면 평화시장이 나온다. 건물 연면적이 약 2만 5천 제곱미터에 이르는 대형 상가다. 1970년도엔 평화시장 2~3층엔 봉제 공장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청계천 주변에 판잣집을 만들어 놓고 그 지하에서 옷을 만들고 지상에선 옷을 팔았다. 평화시장에서 장사하던 상인 대부분이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실향민이어서 평화와 통일을 기리는 염원을 담아 평화시장이라 이름을 지었다. 평화시장을 따라 종로 5가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전태일 다리가 있다. 전태일 동상이 있는 곳. 동상 전태일은 청계천의 물을 딛고 다리 위에 올라서 있는 형상으로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재봉사답게 팔 토시를 끼고 있다. 왼손은 땅을 짚고, 오른 손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다. 조각가 임옥상 씨는 “스스로 산화한 전태일이 땅에서부터 되살아났음을 의미하고, 전태일이 몽상가가 아니라 굳건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전태일 동상은 가까이에서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눈높이 상에 위치해 있다. 하소연도 들어줄 것만 같은 친절한 모습이다.

전태일 다리 양옆으론 바닥에 동판이 설치돼 있다. 보도블록에 깔린 이 동판은 시민들이 성금을 내 만들어졌다. 시민들의 이름과 메시지가 적힌 동판이 4천여 장이 넘는다. 동판에는 수많은 이름과 애환이 서려있다. 이 중엔 故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동판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이란 글귀를 남겼다. 동판을 읽으며 걷다 보면 이 짧은 길에도 오래 머무르게 된다. 참 먹먹하고 가슴 시린 길이다.

어느 틈엔가 반짝하고 큰 동판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전태일의 분신 장소를 표기한 자리. 지나다니는 트럭과 사다리차 작업 소리, 오토바이와 상인들의 대화 소리, 그 밑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지나가지만 무심한 듯 단단하게 그 길을 지켜 주는 글귀가 적혀 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외치며 이곳에서 산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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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는 지금, 안녕한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역 안.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처럼 보이는 여성이 지하철역 간이 의자에 앉아 생활정보지를 보고 있다.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지 종이에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혹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행여나 못 읽고 넘어간 곳은 없는지 이미 봤던 데를 또 보고, 또 본다. 옆에 슬쩍 앉았더니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거 봐. 젊은 사람들만 뽑으려고 일부러 글씨를 작게 해 둔 거야. 이건 뭐, 글씨가 보여야 지원을 하지. 한번은 운이 좋아 취업한 적이 있어. 그런데 늙어서 그런지 막 부려먹는 거야. 참는 데도 한계가 있지. 온갖 추잡한 일은 다 시키고, 좀 나눠서 하자 그러면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 그러고. 연금? 아직 받으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해. 일을 해야 먹고사는데, 내 나이대엔 할 일이 없어. 젊은 사람도 취업난, 늙은 사람도 취업난이야. 늙어서 서러운데 늙었다고 안 써주니까 마음이 조금 그래.”

동네에 도착하니 경비 아저씨 한 분이 폭우와 강풍에 날아온 나뭇잎과 쓰레기를 치우고 계신다. 그러고 보니 늘 계시던 분이 아니다.
“바뀐 지 좀 됐는데. 전에 있던 사람은 해고됐어. 주민들이랑 친하고 일도 잘했는데. 분리수거도 여기가 제일 깔끔했잖아요.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그리됐다네. 나이 많아서 잘랐대. 그래서 줄어든 인원으로 여기 관리하고 있어요. 무슨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이순으로 자르다니. 곧 내 차례도 오겠죠 뭐. 이제 그 양반 어디 가서 뭔 일 하려나 몰라. 아니, 자르더라도 시간을 좀 줘야지. 그냥 당장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 우리는 이게 마지막 직업이다 생각하고 하는데.”

해고는 일을 못 해서 당하는 게 아니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누구나 당할 수 있다. 쫓겨날만 해서가 아니라 그냥 상황에 따라 나가야 한다. 가정의 생계가 당장 벼랑 끝에 몰릴 수도 있지만 그런 건 근로자의 사정일 뿐이다.

전태일 길에 있던 동판이 떠오른다. 보도블록과 똑같은 크기라 색이 바래고 때가 타서 언뜻 보면 그냥 바닥 벽돌처럼 보였다. 사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밟고 지나갈 수도 있는 길의 일부. 삶도 마찬가지다. 화려해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쓸쓸한 뒷모습이 있다. 그 어둡고 쓸쓸한 면은 일부러 들여다봐야 보인다. 가끔은 보이는 것에 안주하지 말고 깊숙이 한 번 들여다보자. 시대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 글에는 서울 종로구 전태일길 평화시장 앞에 있는 동상 전태일이 청계천의 물을 딛고 다리 위에 올라서 있는 형상으로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과, 평화시장 전경, 전태일 다리 양 옆에 시민들이 십시일반 걷은 돈으로 만든 전태일 기념 동판의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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