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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인권 [2018.12] <발레> 여주인공들은 왜 학대당하나

글 윤단우

 

발레는 여성 무용수의 예술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클래식 발레 작품의 제목은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으며, 내용 역시 여주인공의 감정선에 의존해 전개되는 만큼 여성의 존재감이 크다. 그러나 발레 작품에서 쉽게 간과되고 있는 것은 오늘날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살아남아 공연되는 작품의 원작자와 대본 작가, 안무가가 대개 남성이라는 점이다. 철저히 남성의 시각으로 재단된 발레 속 여성 인물들은 남성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여성이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수난을 당하고 심지어는 불행한 최후를 맞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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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
2018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공연 실황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고인이 된 거장 안무가 ‘존 크랑코’의 안무로 1969년 초연된 후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남은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수진 단장이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뒤 벌써 세 번째 공연이 진행됐다.

문제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희곡을 안무가의 별다른 재해석 없이 그대로 무대에 옮겨놓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은 20세기에 발표됐지만, 여성의 미덕을 남성에게 복종하는 데 뒀던 16세기 원작의 세계관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것이다. 작품은 여성스럽지 못한 성격의 주인공 카타리나를 페트루치오가 조련하듯 길들이는 내용이 주요 축을 이룬다. 그리고 여성스러운 성격으로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해온 카타리나의 동생 비앙카가 실은 내숭스러운 본래의 성격을 숨기고 있었다는 반전이 후반부에 제시된다. 말괄량이였던 카타리나는 남성에 의해 여성의 미덕을 배워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한편, 숙녀의 표본이나 다름없던 비앙카는 결말에서 그 위선이 폭로되고 존재까지 부정당한다. 페트루치오의 하인들이 장애인 흉내를 내며 카타리나에게 공포심을 주는 장면 또한 단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삽입됐다.

인간 내면의 죽음 본능과 광기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안무가 ‘케네스 맥밀런’은 ‘존 크랑코’와 동시대에 활동하며 드라마 발레의 전성기를 이끈 안무 거장이다. 그가 로열발레단 예술감독 시절 안무했던 〈마농〉은 1974년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된 이후 드라마 발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며, 로열발레단은 물론 파리오페라발레단과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등 세계 정상급 발레단에서 공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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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
파리오페라발레단 <마농> /
2015년 가르니에극장 공연 실황

 

〈마농〉 3막에는 수인(囚人)의 몸으로 유배지에 간 주인공 마농이 간수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는 장면이 삽입돼 있다. 맥밀런은 아베 프레보의 원작에서 마농이 유배지에서도 시들지 않는 미모로 간수의 구애를 받는 내용을 이렇게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으로 표현한 듯하다. 이러한 학대 장면은 1막과 2막에서 남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화려하게 생활했던 모습과 대조되며 마농의 비극을 관객들에게 더욱 극대화시킨다.

이 부분을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과 비교해보자. 오페라 3막에서 마농은 수난이 생략된 채 곧장 죽음으로 이어진다. 수난 장면이 과감히 생략됐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적 효과가 연출된 걸 보면, 발레에 등장하는 마농의 수난이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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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유니버설발레단 <춘향> /
2018년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공연 실황

 

유니버설발레단의 〈춘향〉은 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심청〉에 이어 우리의 고전을 발레로 옮긴 장편 창작 발레다. 변 사또의 수청 요구를 물리치고 옥에 갇히는 춘향의 고난은 결말에 가서 몽룡과의 재회가 예정돼 있기에 보는 사람들에게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춘향이 겪는 고난의 크기가 클수록 몽룡과 나누는 재회의 기쁨도 배가된다. 그래야만 관객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도 상승하기에 후대의 창작자들이 매우 공들여 묘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발레 〈춘향〉에서는 춘향이 변 사또의 수하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고통받는 것으로 묘사됐다. 이 장면은 발레 〈춘향〉의 원작이 된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춤, 춘향〉에서도 동일한 전개 방식을 보여준다. 춘향의 정신적 고통을 꼭 여성 무용수 한 명이 여러 명의 남성 무용수에게 신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해야만 했는가.

고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고전소설 『춘향전』의 배경으로 설정된 조선시대였다면 춘향은 볼기를 맞는 장형(杖刑)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안무가 입장에서는 여성 무용수가 남성 무용수 여러 명에게 휘둘려지는 편이 미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발레 〈심청〉에서도 심청이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 뱃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당하는 장면이 춘향과 비슷한 전개를 나타낸다. 안무가가 했을 고민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지점이다.

예술은 해당 작품이 생산된 사회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사회 분위기가 쉬지 않고 흐르고 변하면서 예술작품도 변화한다. ‘전통이라서, 과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등의 이유들은 예술작품이 과거의 모습대로 보존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는 변화를 인지 못하는 후대의 창작자가 내놓는 안일한 변명일 뿐이다. 과거에 괜찮았거나 그래도 됐던 것은, 그것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틀린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땐 몰랐고 지금은 틀렸다.

 

윤단우 님은 무용계의 실태를 들여다보는 탐사 취재 <무용계 블랙페이지를 쓰다>를 운영하는 기자&칼럼니스트. 무용계에 적폐를 고발하고 문제 해결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글에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마농. 국립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유니버설발레단의 춘향 발레 공연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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