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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Column [2020.01] 인권으로 함께 헤쳐 나가는 공중보건 위기

글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교훈을 일깨워주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위험한 순간에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따르고 차분히 구조의 차례를 기다려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국가와 사회를 믿을 수 없으니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1년 만에 메르스로 닥친 또 다른 사회적 위기는 인간 사회에서 각자도생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아무리 나 혼자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감염’이라는 상호작용의 소용돌이를 홀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상, 최근의 코로나19 유행은 어렵사리 얻은 사회적 교훈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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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혐오는 원래 난데없다

감염병의 특징은 두드러진 ‘외부효과’에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다른 이로부터 감염될 수 있고, 심지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른 이에게 병원체를 옮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감염자보다는 건강한 사람의 숫자가 많다 보니 내가 누군가에게 병원체를 옮긴다는 우려보다는 다른 이들로부터 감염되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가 된다.
“왜 쓸데없이 돌아다녀서 바이러스를 온통 퍼뜨리는 거야?”라고 감염자를 비난하지만, 사실 감염자는 자신의 감염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고 평소대로 행동했던 것뿐이다. 손가락질하던 그 감염자가 사실은 내일의 나일 수도 있다.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타인, 게다가 그런 위험인물이 평소에도 마뜩치 않았던 종류의 사람들이라면 비난과 배척이 더욱 쉽다.
“원래 위생 관념 없는 사람들, 이상한 식도락이나 즐기던 사람들, 내 이럴 줄 알았다”의 논리는 순식간에 비약해서 중국인 입국 금지 청원 같은 대담한 요구로 나아가기도 한다. 중국 이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대림동은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탐사보도의 현장’이 됐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뜻밖의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 유럽에서 한국인들이 혐오와 차별의 표적이 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 것이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을 가리지 않고 아시아인 전체가 바이러스 유포자로 취급당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일이지만, 인종주의에 기초한 차별과 혐오는 원래 난데없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처구니없는 ‘미러링’ 상황을 통해 스테레오타입과 인종에 기초한 차별과 혐오의 부당함을 성찰할 수 있게 됐다. 아직 대등한 크기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차별과 혐오의 목소리만큼이나 이를 우려하고 자성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것은 메르스 유행 당시에 비해 우리 사회가 한층 성숙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감염병 통제와 인권 보호의 균형

차별과 혐오 이외에도 감염병 통제와 인권 사이에는 고유한 긴장이 존재한다. 공중보건은 대개 정부개입을 통해 집합적 선(善), 인구집단의 건강과 안전 보호를 추구한다. 특히 감염병 통제는 ‘악행 금지’의 원칙에 따라 타인에게 전파를 막기 위해 개인의 자율성과 프라이버시를 위협하는 조치들을 취하기도 한다. 예컨대 2015년 메르스 유행 당시 확진자는 186명이었지만 검역 조치가 이루어진 사람의 숫자는 100배에 가까운 총 1만 6,752명이었다. 의무 예방접종, 접촉자 추적, 자택 격리나 대중 집회 금지 같은 사회적 거리 두기 등도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들이다. 홍역 발생률도 낮은데 왜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반드시 예방접종을 해야 하나? 나는 아무런 증상도 없는데 왜 2주 동안이나 집 밖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인가? 본인의 자유의사에 반해서 어떤 강제적 조치를 하거나 행동을 제약하는 경우, 누구나 합당한 설명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조치에 과학적 근거가 없거나 설명이 불충분하다면, 또한 과정이 불공정하고 강압적이거나 협조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보상이 없다면 사람들은 정부를 불신하거나 정부의 조치를 따르지 않게 된다.
이를테면 아무런 설명도, 물자 지원이나 보호 수단도 없이 무작정 도시를 폐쇄해버리면 사람들은 살기 위해 ‘탈주’를 감행한다. 정당하지 않은 강압적 자유 제한은 정부의 도덕적 정당성에 손상을 가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 대중들은 협조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원래 의도했던 조치의 효과 자체가 상실될 수 있다. 집합적 공중보건 조치와 개인의 인권 보호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감염병 통제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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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침해를 막는 윤리 원칙

인류는 크고 작은 감염병 유행들을 거치면서 감염병 통제와 대비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몇 가지 국제적 윤리 원칙들을 마련해두었다.
첫째,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무엇보다 효과성에 기초해서, 위험에 비례하여, 가능하다면 가장 덜 침습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과잉대응’이 미덕처럼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이러한 제약의 적용은 임의적이거나 차별적이어서는 안 되며,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도 프라이버시와 개인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야 한다. 환자나 밀접 접촉자의 신원, 상세한 동선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것은 감염병 전파 차단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에 대한 오명과 낙인, 접촉자들의 은폐로 이어질 수 있다.
넷째, 이러한 절차들은 당연히 법과 정당한 목표에 따라 엄격하게 시행되어야 하며, 이들을 정당화하는 부담은 국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섯째, 개인들에게 이러한 제약이 가해졌을 때에는 호혜성의 원칙에 따라 적정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들은 본인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유보한 것이다. 사회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최근 코로나19 유행에서 일본 요코하마 항에 정박한 크루즈호에 가해진 검역 조치는 이런 면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가 아닐 수 없다. 개인들의 자유 제약에 대한 호혜적 보상은커녕, 한정된 공간에 건강한 승객들과 잠재적 환자들을 함께 방치함으로써 내부 감염의 위험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여섯째, 자원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기 위해 취약한 인구집단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테면 메르스 유행 당시,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해 있던 가난한 환자들은 격리병상 확보를 위해 서둘러 강제 퇴원 당했고, 삼성병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스크리닝 검사에서 누락되어 뒤늦게 감염을 진단받았다. 의도적인 차별은 아니었지만 평소의 불평등과 차별, 공공부문에 대한 저투자 관행이 공중보건 위기 상황을 만나 극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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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다면 ‘함께’

무인도에 홀로 떨어져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이상 타인, 심지어 전혀 일면식도 없는 동료 시민과의 직간접적인 접촉은 피할 수 없는 인간사의 관습이 되었다. 오늘 아침 지하철, 어제 방문했던 병원, 하루를 보낸 사무실. 그곳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 수없이 접촉한 손잡이와 책상, 의자, 물건들을 떠올려 보자. 나만 조심해서도 안 되고, 또 내 멋대로 행동해서도 안 된다.
멀리 흑사병과 스페인독감부터 최근의 사스, 신종플루, 조류독감, 메르스, 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감염병의 유행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계절 독감이나 결핵 같은 감염병은 꾸준하게 상존해 있다. 공중보건위기 상황이라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유보하기 시작하면, 결국 이는 ‘항구적’ 유보가 될 수밖에 없다. 인류가 지속되는 한 감염병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보는 또 다른 공중보건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가 감염병 유행이라는 공중보건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동료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대, 호혜성이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권의 가치는 공중보건 위기에서도 결코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김명희 연구원은 시민건강연구소에서 건강형평성연구센터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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