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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생각하기 [2020.05] 민주화 운동 속에 핀 꽃, 인권

글 정근식 교수(서울대학교 사회학과)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인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인권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어떻게 인권에 대한 사상이 싹트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투쟁했으며, 또 인권이 어떻게 제도화되었는가에 대해 체계적으로 응답할 방안을 강구한 결과 『대한민국 인권 근현대사』가 편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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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3·1운동(1945)

 

한국 인권사를 바라보는 시각

책을 구상할 때 가장 큰 과제는 한국 근현대 인권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인권사를 서술하는 여러 방법 중 한 가지는 개념사적 접근이다. 그것은 ‘인권’이라는 용어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가를 탐구하고, 이와 함께 인권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인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평가할 때 실질적으로 인권을 의미하는 용어나 개념을 사용한 사례를 포함하는 것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인권 개념은 서구적 맥락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권으로부터 인간의 잠재적 역량을 구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사회권으로 발전했다. 다만 한국 인권사가 더 복잡다단한 것은 그 개념이 한말의 정치적 위기와 일제의 지배, 분단과 전쟁이라는 경험 속에서 싹 텄으며 독재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부터 역동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현대적 인권사상은 민주화운동 속에서 배태됐다. 한편으로는 남북분단에서 오는 어려움과 국가 주도적 개발성장주의가 가져온 불평등과의 대결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로부터 크게 이탈한 1970년대의 유신체제는 한국의 현대적인 인권 사상과 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제공했다.
인권은 사회적인 맥락에서 불평등이나 차별, 또는 혐오나 낙인에 반대하는 사상적 기초가 됐다. 또 인권은 국내의 경험뿐 아니라 해외에서 발전하고 있는 인권규범들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최근의 기후와 환경의 위기를 감안한다면, 인권은 인간과 자연(환경)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기도 한다.
인권사 연구에서는 개념사적 검토와 함께 방법론적 논의가 필요하다. 오래된 사회사적 방법을 적용한다면, 인권사는 주요 사건이나 주체들을 중심으로 하는 행위중심적 접근(사건사와 운동사)과 제도중심적 접근(법과 제도의 역사), 그리고 구조중심적 접근(오래 지속된 관행이나 침묵 당한 사람들의 역사) 등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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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인권 관념

한국의 근현대 인권사를 의미 있게 구성하려면 개념사적 접근뿐 아니라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인권에 대한 다양한 생각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간위원회는 시간과 예산의 제약으로 본격적인 사회조사는 실시할 수 없어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를 통해 인문사회계열 주요 학회 구성원 12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주요 내용은 인권 100년사를 구성하는 소주제와 항목의 타당성 검토 및 인권과 연관된 주요 사건이나 인물 조사였다.
‘한국 인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많은 응답은 5·18민주화운동, 그 다음으로 6월항쟁, 전태일사건, 반성폭력운동, 노동운동 순이었다. 1980년과 1987년의 시민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인권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민주화운동과 연관돼 있거나 민주화운동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한국 인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에 대한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은 전태일이었고, 김대중, 조영래, 권인숙, 문익환이 뒤를 이었다. 1970년에 발생한 전태일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노동자의 인권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역사적 사건임이 틀림없다. 두 번째가 김대중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1970년대에는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한국인들에게 ‘인권’이라는 용어를 친숙하게 했다면 90년대에는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을 연결해 생각한다면 한국에서 인권은 확실히 민주주의와 긴밀히 연결돼 있으며 사건보다는 인물이 인권에 대한 이미지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 변별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사는 매우 시론적인 것이어서 일반화를 하기 어렵고, 보다 구체적인 조사를 통한 심층적인 인권 관념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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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오월-06-혈루-1(1987), 출처 : 광주시립미술관

 

인권의 시각화

방대한 분량의 『대한민국 인권 근현대사』 발간작업을 불과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마무리하고 보니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인권과 문화예술이라는 주제를 포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인권이 어떻게 문화·예술적 형식으로 재현되어 왔는지, 인권 사상과 운동이 문화예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또 한국인들이 인권을 논의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나 도상은 무엇인지를 질문할 수 있다. 이는 예술가들이 시각적으로 만들어낸 작품들에 영향을 받기 쉽다. 특정 그림이나 사진은 보다 상징성이 강한 도상으로 발전하는 원천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필자의 경우, 1970~80년대에 인권이라는 개념을 접할 때마다 떠올린 이미지는 앰네스티가 사용하는 도상, 즉 철조망이 몸통을 감고 있는 촛불이었다.
인권 개념이 사회운동 속에서 배태되었다면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이를 그린 그림들을 살펴보는 것도 인권 연구의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대표적 사례로 이응노의 3·1운동 그림과 손장섭의 4월혁명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이응노의 3·1운동 그림은 흰옷을 입고 시위하는 조선인들과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검은 제복의 경관들을 대비시킨 것으로, 해방 직후에 단구미술원이 주최한 3.1운동 기념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다. 1960년 4월혁명은 인권보다는 민주혁명이라는 맥락에 서 논의되어 왔다. 4월혁명 당시의 모습을 그린 화가는 많지 않은데 그 예외가 손장섭이다. 당시 서라벌 예술고등학교 학생이었던 그는 대한문 근처에서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4월의 함성’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부상당한 동료를 양쪽에서 부추기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필자가 아는 한, 한국의 인권상황을 그린 그림의 출발점에 있는 작품이 동백림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이응노가 그린 추상적 자화상이다. 그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1968년 12월 15일과 16일 세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불을 뒤집어쓰고 추위와 싸우고 있는 장면이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 겪었던 ‘가장 춥고 괴로운 날’이라는 표현을 화폭에 써넣었다.
이밖에 좀 더 구체적인 인권 상황은 1970년대 정치적 자유 및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상황을 표현한 도미야마 다에코의 ‘양심수(1972)’와 김지하의 시 ‘고행’ 시리즈가 있다. 5·18민주항쟁의 모습은 다에코의 판화 ‘광주의 피에타’, ‘자유광주’, 홍성담의 ‘혈루’, ‘대동세상’, ‘사시사철’ 시리즈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사회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던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직된 한국의 인권운동단체들은 자유권적 인권을 상징하는 앰네스티의 로고와는 다른 로고들을 채택했다.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도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모습이 포함된 로고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성공적인 것은 제주도의 4.3 단체들이 채택한 동백꽃 배지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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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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