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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어머니집 이명자 관장

[특집] 마주듣기 [2020.05] 역사를 품다, 오월어머니회
오월어머니집 이명자 관장

글 이연희(자유기고가) 사진 봉재석

 

40년 전 오월, 광주에 여성들이 있었다. 시위대열에 함께했던 여성, 가두방송을 했던 여성, 도청에서 시민군에게 식사를 제공했던 여성, 부상자들을 돌보던 여성,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여성이 있었고, 광주항쟁 후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을 위해 40년 동안 싸움의 끈을 놓지 않은 여성, 역사가 주목하지 않아도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왔던 오월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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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 가족모임에서 시작되다

지난 4월 27일 전두환 씨가 광주지법 법정에 출두했다. 5·18광주항쟁 당시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서였다. 오월어머니회 회원들은 사죄의 말을 듣기 위해 법원 앞에서 전두환 씨를 기다렸다. 하지만 경찰의 저지로 그를 대면할 수 없었고, ‘책임자 처벌’, ‘진상 규명’ 구호를 외치며 재판이 끝날 때까지 5시간을 기다렸지만 역시 만날 수 없었다.
“굉장히 허탈했어요.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40년이 됐기 때문에 영령들과 피해자, 광주 시민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길 바랐죠. 그런데 얼굴도 못 보고 돌아와야 했어요.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여전히 법의 보호를 받고 있고, 우리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는 사실이 속상했죠.”
오월어머니집 이명자 관장이 속한 오월어머니회는 광주항쟁에서 사망하거나 구속, 또는 부상을 입은 피해자 가족인 여성들의 모임이다. 1980년 10월에 결성된 구속자 가족모임이 그 시작이다. 5·18광주항쟁 과정에서 일반 시민과 학생들이 폭도로 몰려 체포되었다. 이명자 관장의 남편인 정동년 전 광주 남구청장의 경우 내란수괴로 지목되어 5월 17일 밤 경찰에게 끌려갔다. 이명자 관장이 둘째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이 겨우 지났을 때였다.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 다음 날부터 남편을 찾으러 다녔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구속자 가족들을 만나게 됐어요. 구속자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재판이 시작된 80년 10월 구속자 가족모임을 만들게 됐죠.”
5·18광주항쟁 직후이자 군사정권이었던 시절, 구속자 가족들은 기댈 곳이 없었다. 억울한 사연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조차 혹시라도 피해를 볼까봐 구속자 가족을 피하고 떠나갔다. 그때 위로가 되어준 사람들이 오월어머니회 전신인 구속자 가족모임 회원들이었다. 함께 구속자 석방운동을 하며 동지이자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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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위치한 오월어머니집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누비다

5·18 관련 구속자는 2,522명이었으며 이 중 61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돼 255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정동년 전 광주남구청장을 비롯한 5명이 사형을, 7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형수의 경우 2심에서도 사형을 언도받았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사형을 시킨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그 사람이 남편이었어요. 전두환 신군부가 짜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내란수괴가 된 것도 억울한데 사형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요. 그래서 사형수들을 구명하고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죠.”
정부에서는 광주항쟁에 참가한 시민군을 폭도로 매도했고, 광주 밖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진실처럼 굳어갔다. 오월어머니들은 단식농성을 하고, 광주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시도하는 등 구속자 석방운동과 함께 항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저항운동을 이어갔다.
1981년 3월 31일 대법원은 2심과 마찬가지로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그날 구속자 가족들은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었다. 손으로 직접 내용을 쓰고 밤새워 등사해 경찰의 감시를 피해 새벽 2~3시에 집을 나서서 서울의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미사가 끝나자 연단에 올라가 유인물을 배포하고 광주항쟁과 구속자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고 김수환 추기경의 배려로 가톨릭 서울대교구장 집무실 점거농성이 이뤄졌다. 전두환 군사정부는 같은 해 4월 3일 특별사면을 통해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낮추는 등 5·18 구속자들에 대한 형을 감형했다.
석방 운동을 하는 동안 구속자 모임 회원들은 집안일에 충실했던 주부들에서 투사로 변신해 갔다. 교도소장과 경찰서장과도 맞붙어 싸웠고, 구속자들에게 불리하게 재판이 진행되면 재판정을 뒤집어엎기도 했다.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세상은 엄혹했고 구속자 가족의 현실은 억울하고 절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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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어머니집 벽 한쪽에는 오월어머니집을 짓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포용과 연대로 역사 발전에 기여

5·18 구속자들이 석방된 뒤에도 오월어머니들은 거리에 섰다. 5·18광주항쟁을 알리고자 하는 대학생들이 분신하면 병원으로 달려갔고, 1987년 6월 항쟁 전까지 크고 작은 민주화 집회에서 노동자, 학생들과 함께 했다. 하루 종일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은 날이면 팔뚝에 작은 수포들이 돋아났고, 경찰들과 맞서 싸우느라 맞기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거리에 서있는 학생, 노동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월어머니회의 구속자 석방운동 경험은 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민가협) 활동으로 이어졌다. 학생·노동운동 과정에서 구속된 이들이 석방되는 데 힘을 보태고, 전국에 있는 교도소를 다니면서 재소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활동도 전개했다.
오월어머니들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현장에서 맞았다. 6월 항쟁 때 그랬고, 2016년 촛불집회 때도 거리에 섰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팽목항으로 달려가 세월호 어머니들을 껴안았다.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함평양민집단학살 등 현대사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고 그 가족들을 위로해 오고 있다.
“오월어머니들은 멈춤이 없었어요. 가야할 길이라면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자, 그것이 5·18광주항쟁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오월어머니회는 회원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공동체 활동을 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2001년 오월여성회를 창립하고 쉼터를 마련했다. 이후 2006년 현재의 자리에 오월어머니집을 짓고, 사단법인을 등록했다. 오월어머니집은 어머니들의 쉼터인 동시에 오월정신을 계승하는 공간으로서도 활용되고 있다. 주먹밥 나눔체험을 매월 1회 운영하고,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5·18광주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5·18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40년이 됐는데도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진 게 없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건 오로지 책임자 처벌, 진상 규명입니다. 아직도 어머니들은 오월만 되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가슴을 옥죄는 듯한 통증에 시달립니다. 오죽하면 달력에서 5월을 파내어 버리고 싶다고 합니다. 책임자를 처벌하고, 희생자가 몇 명이고,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등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5월 광주는 계속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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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어머니집 입구에 들어서면 오월어머니의
아픔을 담아낸 작품과 기념품이 전시돼 있다

 

 

이연희 작가는 글 쓰는 게 일인 글 쓰는 노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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