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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인권 [2020.05] 텔레그램 ‘박사’ 조주빈 검거되던 날

글 김정화 기자(서울신문) 사진 n번방 시위팀

 

기자들의 단체 채팅방은 종일 쉴 새 없이 울린다. 각종 기사나 정보, 공지, 업무 지시 등이 채팅방에서 시시각각공 유된다. 3월 17일 저녁, 퇴근을 앞두고 사회부 사건팀 채팅방에 올라온 서울지방경찰청의 공지를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 경찰이 텔레그램 ‘박사방’을 운영한 유력 피의자를 포함한 일당을 붙잡았고, 이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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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 시위 현장

 

반복되는 디지털 성범죄, 어느새 무뎌졌다

‘n번방’으로 통칭되는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말 즈음이다. 트위터에는 ‘n번방에 관심을 가져달라’, ‘박사방 관련 계정을 신고해 달라’는 글이 왕왕 올라왔다. 범죄로 추정되는 사건 신고를 봤으니 기자라면 당연히 취재를 해야 할 텐데,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성착취가 흔히 ‘몰카’로 잘못 부르는 단순 불법 촬영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미처 몰랐기도 했지만, 사실은 매일 반복되는 디지털 성범죄에 무뎌져버린 까닭이었다.
수습기자 시절, 10차선대로 건너편에서 망원 카메라로 나체를 찍혔다는 불법 촬영 피해자를 취재한 적 있다. 한밤중에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카메라 속 영상을 보여주며 “본인이 맞느냐”고 해 그제야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단다. 하지만 그 뒤로 가해자는 구속조차 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자신의 사진이 온라인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며 전전긍긍했는데, 가해자가 누군지 모르니 피할 수도, 항의할 수도 없었다.
경찰에게 이런 우려를 물으니 수사팀장이라는 사람이 한 말은 이랬다. “누가 언제 어디서 찍을지도 모르는데 예방을 어떻게 합니까.” 그게 끝이었다. 그 뒤로도 디지털 성범죄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지만, 답답한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디지털 성범죄 취재 과정에서 경찰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해외 서버라서 잡기 힘들다”였다.
아직도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디지털 성범죄는 온라인에서 극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살인 같은 강력범죄처럼 목숨을 잃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피해자들이 먼저 잘못해서 그런 영상을 찍힌 것 아니냐’는 생각이 강하다. 이번 사건에서도 피해자 몇몇이 ‘일탈계’를 운영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본인이 자초했다”는 말이 나왔다. 일탈계는 온라인에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노출하는 익명 계정이다.
하지만 일탈계를 운영했다고 해서 성적 자기 결정권까지 빼앗겨 타인에게 착취당하고, ‘노예’로 부려지며, 수백 명의 ‘관중’이 낄낄대는 대화방에서 나체를 공개당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피해자가 무조건 순수하길 바라며 이들을 비난하는 건 명백한 2차 가해다.
이런 흐름은 n번방 피해자들이 그간 어디에도 피해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대화방 운영자들은 피해자에게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을 요구하고, 이를 빌미로 신체를 찍게 한 뒤 “영상을 유포하겠다”, “주위에 알리겠다”는 식으로 이들을 협박했다. 실제 피해자 대부분은 일탈계를 운영했다는 사실 때문에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주위에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그래서 n번방 사건이 전국적 이슈로 커지기 전, 경찰에서 가해자들을 쫓기 전부터 피해자를 위해 선뜻 손 내민 여성들을 만나며 제일 먼저 든 건 반성과 미안함이었다. 내가 n번방 사건을 알고도 ‘잡히긴 할까’ 의심했던 반면, 어떤 이들은 ‘남 일 같지 않다’면서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몇 달간 끈질기게 싸웠다.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을 최초로 알린 대학생 추적단 ‘불꽃’은 박사방을 포함한 수많은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대화를 모니터링하고, 채증해 수사기관에 협조하고, 피해자와 연락하려고 애썼다. 그 뒤를 ‘프로젝트 리셋’이 이어 계정 신고에 나섰고, ‘n번방 시위팀’은 n번방 가해자들에 대한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까지 열었다. 이들은 모두 “사건이 너무 심각한데,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당장 피해자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무력감과 스트레스가 컸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들이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내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디지털 성범죄는 더 이상 일부의 문제가 아니다. 각종 장비를 활용한 불법 촬영은 물론 지인 능욕 합성 등으로 범죄는 갈수록 악랄하고 일상적으로 벌어지는데도 가해자들은 여전히 ‘초범이라서’, ‘반성하고 있어서’, ‘아직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라서’ 법망을 빠져나가고, 피해자는 음지로 숨어든다.
n번방은 방식만 ‘진화’했을 뿐 전혀 새롭지 않다. n번방 이전에 불법 촬영과 웹하드 카르텔이 있었고, 그전에는 소라넷이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를 비롯한 여성대상 폭력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에게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몇몇 가해자를 잡아들인다고 범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도구로 보는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문제는 그대로다. ‘박사’와 ‘부따’, ‘이기야’ 등 박사방 운영자는 물론 ‘와치맨’, ‘갓갓’ 등 주요 가해자까지 속속 붙잡히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들이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딱 2년 전인 2018년 5월, 혜화역에서는 불법 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시위가 처음으로 열렸다. 붉은 옷을 입은 여성 수만 명이 모여서 분노했다. 시위 주최 측 이름은 ‘불편한 용기’였다. 그때 수사기관과 입법부, 사법부에서 그 불편한 용기를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이들이 여성을 유희로 소비하는 행태에 같이 분노하고,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손가락질 했다면. 그러면 여성 수십 명의 세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까.

 

 

김정화 기자는 서울신문 사회부 사건팀에서 취재를 하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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