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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 항쟁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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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 항쟁의 기록

글 편집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는 수없이 많은 피땀 위에 세워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가 불씨가 되어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역사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6월 민주 항쟁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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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탁치니_억하고_쓰러졌다 #박종철 #고문사실은폐
1987년 1월 14일, 학생운동을 하던 박종철 학생이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사망했다. 이에 따른 경찰의 발표는 “냉수를 마신 후 심문을 시작하며 책상을 ‘탁’ 치니까 억하고 쓰러졌다.”였다. 그러나 당시 부검을 맡은 오연상 부검의의 증언과 부검 내용이 밝혀지면서 경찰의 발표는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고 박종철 학생을 고문했던 고문 경찰 조한경과 강진규를 구속했고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4·13 호헌조치

#전두환 #시국선언 #호헌철폐운동
같은 해 4월 13일,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와 직선제 개선 논의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은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두환의 대처는 국민들의 더 큰 반말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사회단체를 비롯해 종교계, 대학교수들의 시국 선언이 줄을 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장기집권의 음모를 비난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 6월 민주 항쟁의 전개

#이한열_최루탄_사망 #6월10일 #규탄대회
김승훈 신부에 의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음이 폭로되자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 6월 10일에 대규모 규탄 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시위를 하던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이 전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이 사건은 6월 10일 열린 시위의 규모가 더욱 커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 6·29 선언

#호헌철폐_독재타도 #6월29일 #군사적_독재_정치_종식
마침내 1987년 6월 10일 아침이 밝았다.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렸고 전국 각지에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규탄과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운동이 진행됐다. 거리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6월 10일을 시작으로 시위는 전국 단위로 이어졌다. 국민의 저항을 이기지 못한 전두환 정부는 같은 해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알리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6월 민주 항쟁으로 인해 마침내 긴 세월 대한민국을 앓게 만든 군사적 독재 정치가 끝나고 우리나라에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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