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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기억해야 할 인권운동

[특집] 깊이읽기 [2020.06] 우리가 몰랐던,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인권운동

자료 『대한민국 인권 근현대사』(2019) 정리 김혜정(편집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주력했던 ‘자유권’은 ‘인간답게 살 권리’다. 당시 ‘자유’의 의미가 ‘독재정권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의미였다면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인권을 전문적인 수임사항으로 내건 조직과 단체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자유는 ‘평등한 자유’라는 적극적 의미로 재사유하고 재구축됐다. 드러나 있지 않아 우리가 몰랐던,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인권항쟁을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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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권리를 넘어 패러다임으로

1970~80년대 초반 국제연합(UN)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장애인 인권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UN은 1975년에 「장애인 권리 선언」을 채택하고 1981년을 ‘국제 장애인의 해’로 지정했으며 그 후속 조치로 1982년에는 ‘장애인에 관한 세계행동계획’ 채택, 1983년부터 1992년까지는 ‘유엔 장애인 10년’으로 선포했다. 대내적으로는 ‘복지국가 건설’을 구호로 내건 전두환 정권이 1981년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지정하고 88년 서울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과 장애인올림픽이 개최되며 국제 사회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장애인 복지에 형식적으로나마 관심을 보였다. 80년대 중반 국내에서 다양한 장애인 단체가 결성되기도 했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지역과 영역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끌어 오르던 상황이었다. 이 시기와 올림픽이 맞물려 장애인 운동은 진보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양대 법안 투쟁’과 ‘장애인올림픽 거부 투쟁’이 시작이었다.
당시 장애운동권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체에 일정 비율의 장애인 고용을 의무화하는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실질적 지원 내용이 부재했던 「심신장애자복지법」의 전면 개정을 강하게 요구했고 ‘기만적인 장애인올림픽 폭로 및 장애인 인권쟁취 경의대회’가 개최됐다. 장애인올림픽 거부와 두 법안의 개정을 요구하며 철야 단식 농성이 전개됐다. 투쟁 끝에 88년 12월 16일 「장애인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현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며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안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뀌어 12월 30일 본회의를 통과, 장애인 등록제와 저소득 장애인에 대한 의료비, 교육비 지원 및 생계 보조수단 지급, 공공요금 감면 등을 시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이후에도 그들의 생존권은 여전히 위협받고 열악했다. 하지만 시설 민주화 투쟁과 교육권 보호, 노동권, 이동권, 차별, 참정권 등 개별 권리를 행사하고자 하는 이들의 외침은 지금까지 계속되며 많은 변화를 만들고,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게 됐다.

『대한민국 인권 근현대사』 4권, 김도현 연구활동가(노들장애학궁리소)

 

권리를 가질 권리1)

1990년대 초 전 세계가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로 위기에 빠지자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이 국내외로 증가했다. 국내적으로는 군부집권시대가 끝나고 사회·문화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시민 단체들이 생긴 데다가 계급적·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면서 성 주체성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문제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3년 국내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 단체 ‘초동회’를 시작으로 현재 한국 레즈비언 상담소의 전신인 ‘끼리끼리’, 해체된 초동회의 후신을 표방한 ‘친구사이’, 서울대학교 ‘마음 001’, 연세대학교 ‘컴투게더’ 등 여러 단체가 하나 둘 생겨났고 이들은 1995년 ‘한국동성애자인권단체협의회(동인협)’를 구성했다. 그리고 26개 단체가 모인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한동협)’을 출범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거리 투쟁과 집단적 커밍아웃 등으로 좀 더 힘 있고 대표성 있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시민사회와 연대하며 사회현장 일선에 있던 그들은 1997년 ‘중고교 교과서 개정 촉구 집회’를 시작으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집회에서 그들은 “현행 교과서에서 동성애가 차별적으로 다뤄진 것에 항의하고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를 밝혔다. 이를 시작으로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 <해피 투게더> 심의 불가 판정에 저항하는 시위, ‘서울 퀴어 영화제(SQFF)’ 무산에 항의하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서명운동’, ‘왜곡된 언론 보도와 에이즈 예방 정책에 반대하는 범동성애자 결의 대회)’ 등의 시위가 이어졌다.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앞뒀을 때는 반(反)성소수자의 거센 움직임에 항의해 기자회견, 플래시몹, 1인 시위, 국제연대 등 더욱더 폭넓은 연대로 역량을 키웠다. 비록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못했으나 이 투쟁은 차별과 혐오에 맞서기 위한 결집된 운동의 필요성과 연대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했다. 이로 인해 2018년 5월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발족했으며 10개 단체로 시작한 무지개행동은 2019년 10월 기준 39개의 단체가 함께하고 있다.

『대한민국 인권 근현대사』 4권, 이종걸 활동가(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박한희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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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만의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민주화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이 시작됐다. 군사독재의 종식과 경제성장, 대중문화의 발달은 민주화가 이뤄질 거라는 기대감을 한층 더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일원인 청소년의 입장에서, 민주화는 ‘어른’만의 것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지만 선거권 제한 연령 기준은 1960년 4·19 당시 정해진 만 20세였다.
청소년들이 하루 일과의 반 이상을 보내는 학교의 현실도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이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가 내놓은 ‘5·31 교육 개혁’은 청소년의 자율과 다양성을 중점으로 교육을 개혁하겠노라 했지만 현실은 타율과 획일성, 폭력이었다. 두발과 복장 규제는 당연한 일이었고 강제 이발도 빈번했다. 교사의 구타와 군대식 얼차려, 언어폭력은 없는 날이 드물 정도였다.
1990년대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청소년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문제를 공유하고, 활동의 방향을 논의했다. 대표적인 계기가 ‘최우주 헌법소원 사건’이다. 1995년 강원도 춘천고등학교 최우주 학생이 교육청에 “강제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는 내용으로 민원을 제기해 논란이 됐다. 그의 헌법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여기에는 단순히 ‘철없는 학생의 불만 표출’이 아니라 ‘헌법의 문제’이자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보라는 요구가 담겨있었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청소년 인권문제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다.
온라인에서 싹튼 청소년인권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대두된 것은 2000년 두발규제반대 온라인 서명운동인 ‘노컷운동’을 통해서다. 짧은 기간에 16만 명이 넘게 서명하며 크게 이슈화됐고 ‘학생인권’을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켰다. 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청소년인권운동단체들이 많이 생겨났고, 성장했다.
이후 체벌, 종교 및 표현의 자유, 개인정보침해, 노동권 등 다양한 청소년인권 문제가 공론화됐다. 그리고 학생들은 과거 3·1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것처럼 정치의 광장에 섰다. 촛불을 들고 함께 분노했으며,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18세 선거권을 얻어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침해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실천은 청소년인권운동을 이어지게 할 것이다.

『대한민국 인권 근현대사』 4권, 유윤종 활동가(교육공동체 벗)

 

1)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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