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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오지 않습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 이사장

인권이만난사람 [2020.06] 인권 회복과 평화는
거저 오지 않습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 이사장

글 정희화(자유기고가) 사진 김인규

 

노근리 평화기념관 전시실에 커다랗게 박혀있는 말. ‘인권 회복은 수많은 이들의 땀과 희생으로 이뤄지며, 평화는 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 앞에서 정구도 이사장은 몇 번이고 평화를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평화는 절대 공짜가 아니고, 평화만이 인권을 지킬 수 있는 길입니다.” 노근리평화기념관의 관장이자 노근리국제평화 재단의 이사장인 정구도 이사장을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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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 잊혀진 희생자들

한국전쟁 초기였던 1950년 7월, 미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하루가 다르게 아래로 밀리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에서 영동방어를 맡았던 미군은 북한군이 몰려오는 피난민들 사이에 숨어서 침투하지 않을까 경계를 강화했다. 이 때문에 영동군 황간면의 여러 마을에도 소개령이 내려졌고,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도 피난길에 올랐다. 7월 25일, 두 마을 주민들을 주축으로 약 500~600여명으로 추정되는 피난민들이 경부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피난길에 만난 미군의 통제로 무리는 경부선 철길 위로 올라가고, 짐 검사를 받던 중 갑자기 상공에 미 군용기가 나타났다.
어리둥절해하던 사람들 위로 순식간에 총알이 날아들었고, 수많은 사람이 철길 위에서 영문을 모르고 죽어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리 아래 쌍굴로 피했지만, 이번엔 굴 안으로 총격이 시작됐다. 7월 26일 밤, 굴 안에 숨어 있던 젊은 생존자들은 밤을 틈타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과 어린이, 노인들은 탈출하지 못했고 3일간 계속된 총격 끝에 대다수가 사망했다. 7월 29일 노근리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굴 안에서 버티던 소수의 생존자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5일간 수백 명이 사망했고, 공식 확인된 사망자 중 72%는 여성과 노인,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다.
이후 전쟁은 멈췄고 한반도는 분단됐으며, 미국과 한국의 동맹 관계는 더욱 중요해졌다. 피난길에 죽었던 수백 명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아무도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노근리 사건은 그렇게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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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평화공원 전경

 

싸워온 시간들

정 이사장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부모님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이 일로 아이 둘을 잃었고, 어머니도 큰 부상을 입었다. 1960년, 아버지가 주한미군에 소청서를 제출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없었고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더는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가 됐다. 그러자 아버지는 당시 사건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정 이사장은 아버지 원고를 퇴고하면서 피해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게 됐고, 이는 노근리 사건을 일리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계기가 됐다. 이후 2년에 걸쳐 10번에 가까운 퇴고를 하며 여러 출판사를 찾아다닌 결과 1994년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출판됐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노근리 사건을 몰랐고, 피해자들은 목소리를 내길 꺼렸다. 미군 관련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대책위원회’(이하 피해자 대책위)를 창립했지만 참가자는 정 이사장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다섯 명 뿐이었다. 우리나라 대통령, 국회, 각 정당 대표뿐만 아니라 미국 대통령과 상하원 의장 앞으로 계속 진정서를 보냈지만 미 정부의 답변은 “사건 현장에는 미군이 없었다” 또는 “있었지만 개입하지 않았다”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국내외 언론사에 끊임없이 당시의 진상에 대해 알렸다. 관련 논문을 학계에 발표하고 추가 증거를 모았다. 4년 가까운 끈질긴 노력 덕분일까, AP통신에서 노근리 사건에 대한 심층 취재를 시작했고 1999년 탐사보도가 터지자 곧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CNN 등 유수의 언론사들이 대서특필했다. 한국 언론도 노근리 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루기 시작했고, 미국과 한국 정부도 결국 움직였다. 정 이사장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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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관에는 노근리 학살 사건의 전모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과정이 전시돼 있다

 

잊혀진 사람들을 찾아내기까지

1999년 10월, 노근리 사건에 대한 한미 공동 진상조사와 피해접수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다른 민간인 학살도 알려졌다. 조사 끝에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피해자와 한국 국민을 대상으로 유감표명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건 발생 50년 만이었다.
“미군 관련 사건에 대해 미국 현직 대통령이 유감 표명을 한 것은 노근리 사건이 유일합니다. 한미관계사나 인권사 측면에서 볼 때 기념비적인 일이죠. 피해자와 유족들이 진상 규명과 피해 구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사례도 보여줬습니다.”
미 정부는 희생자 추모비 건립과 희생자 자녀들에 대한 장학기금 제공을 제안했다. 하지만 대책위는 이를 거절했다. 당시 미국이 제시한 후속조치 사업은 한국전쟁 때 벌어진 모든 미군 관련 사건 희생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노근리 사건 외에 조사가 진행된 바가 없어 나중에 다른 피해자들이 구제를 받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후속조치 사업은 무산됐다.
정 이사장의 아버지는 피해접수 이후에도 심사가 이뤄지지 않자 2002년 특별법 입법 청원서를 제출했다. 노근리 사건의 진상 재조사와 배·보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2년 가까운 입법 노력 끝에 국회 만장일치로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특별법으로 실시된 피해자 심사 결과, 총 226명의 희생자와 2,240명의 유족을 확정했다. 사건 발생 후 55년이나 지난 뒤였기 때문에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 사실을 심사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법안이 통과 되었다는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시대에 비해 상당히 앞선 법이고, 사건 발생 50여 년 만에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노근리 사건과 희생자를 인정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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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도 이사장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권회복과 평화, 노근리 정신

특별법 덕분에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평화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는 평화공원도 만들어졌다. 공원 내에는 복원된 쌍굴 사건현장과 희생자 추모탑, 평화기념관, 교육관 등이 들어섰다. 연간 14,000명이 방문하는 이 공원은 사람들에게 전쟁이 초래한 인권 유린의 현장을 보여주고,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한다.
“많은 인권 침해 사건이 역사적 배경과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가 연결되고, 한국전쟁과 노근리 사건이 연결되죠.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재발됩니다. 노근리 사건 같은 일이 다시 재발하지 않으려면 역사와 인권 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정 이사장은 노근리 사건이 다른 인권 침해 사건 해결에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과거사 문제 중에 이만큼이나마 진척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근리사건특별법 제정 이후 다른 과거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많아졌고, 이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의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노근리 사건이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과거사 진상규명의 시작을 연 셈이다.
인권 회복의 과정은 지난하고, 많은 사람들의 지식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 고단하고 외로운 싸움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건 피해자들의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잊혀진 피해자들에 대해 알리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헌신했던 시간. 그 속에서 정 이사장이 삶으로 외쳐온 말은 바로 생명의 존엄, 그리고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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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평화기념관 전경

 

 

정희화 작가는 국내외 NGO에서 5년간 국제개발협력과 이주민 지원 업무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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