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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챌린지 [2020.06]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글 김보섭(편집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스스로를 불사르며 이렇게 외쳤다. 전태일 열사는 평범한 청년 노동자였지만 노동 인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2020년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시위 50주년이 된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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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로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전태일은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생계를 위해 12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동대문 시장에서 잡일을 시작했다.
열일곱 살이 된 1965년, 아버지에게 배운 미싱 기술로 평화 시장 삼일사에 취직한 전태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봉사가 됐다. 임금도 하루 50원에서 한 달 3,000원으로 대폭 올랐다. 평화시장에서 일을 한 지 1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주변을 볼 겨를도 없었던 그에게 어느 날부터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 그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박봉, 질병에 시달리는 모습. 그것은 전태일이 겪었던 그리고 여전히 겪고 있는 고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전태일은 사회의 모순과 노동자들의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전태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을 공부할수록 현실과의 괴리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동료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 시장의 노동 환경과 실태를 조사했다. 노동청에 근로 기준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탄원서를 보내는 등 근로기준법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했으나 모두 거절당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간에 소거되기 일쑤였다.

 

근로기준법을 불태우다

1970년 11월 7일은 노동청이 법을 개정해주겠다고 약속한 날이었다. 하지만 노동청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 다음 날인 8일 전태일은 노동 운동을 하는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며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제안한다.
거사 당일인 11월 13일, 몸에 석유와 휘발유를 붓고 평화시장 앞길로 뛰쳐나온 전태일은 몸에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고 외쳤다. 이내 쓰러진 그는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같은 날 오후 10시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배고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해 아들의 뜻을 이어갔다. 청계피복노조는 1998년 서울의류노동조합과 합쳐져 해산할 때까지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조직이었다.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 3일 별세하기 전까지 여러 노동운동 현장과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노동운동가들을 위해 애썼다.
죽음도 불사하며 노동운동에 모든 걸 던진 전태일. 그리고 못다 이룬 그의 뜻을 대신 이어간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노동운동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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