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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생각하기 [2021.05]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현재-미래, ‘국경’을 넘어선 연대

글 이광일(성공회대 강사,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현재-미래, ‘국경’을 넘어선 연대

 

민주주의,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동일성’

 

적잖은 이들이 한국은 경제발전이라는 성과와 함께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로 평가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전자의 주체를 ‘산업화 세력’, 후자를 ‘민주화 세력’으로 호명하며 이제는 그 두 세력이 다투지 말고 힘을 합쳐 더 번영된 나라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사실 그런 언술을 접하면 뭔가 공허한데, 그 이유는 거기에서 ‘주권자인 대중’은 그들 주체의 정치적 목적, 경제적 성과를 위해 배제/동원되는 대상으로만 취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은 민주주의에 관한 규정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사회가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그리고 지구화 시대에 더 도드라지고 있는 이주자 등을 한 축으로 하는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정치엘리트들이 이미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역설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에 관한 그 어떤 발상이 대중적으로 공유되고 있기 때문인데, 엘리트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최소로 규정된 민주주의(최소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슘페터(J. Schumpeter)의 논의로 대표되는 최소민주주의는 정치엘리트들이 경쟁할 수 있고 대중이 그들을 선호-배제 할 수 있는 법, 제도의 존재 및 작동 여부를 민주주의의 준거로 삼는다. 즉 선거라는 예측 가능한 기제를 통해 정부와 의회가 안정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면 민주주의를 이룬 것이 된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계승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자신들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치장할 수 있었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가시지 않는 의문이 있다. 이른바 ‘민주정부’가 등장한 이후 벌써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스팔트 위, 철탑, 공장 등에서 인간다운 삶과 존엄을 요구하는 아우성이 끊이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실현되었다고 칭송되는 그 민주주의는 왜 저만치 떨어져서 그 아우성을 외면하고 심지어 비아냥거리기조차 하는가. 그도 그럴 것이 최소민주주의 발상은 대중을 고통스런 삶으로 밀어넣고 그들의 자존을 부정하는 부당한 관계들을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기에 애초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중의 삶과 존엄을 자신의 정체를 구성하는 준거로 삼는 발상은 없는가. 있다.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동일성”으로 보는 발상이 그것이다. 이에 근거하면, 민주주의의 실현 과정은 자기통치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장애들을 해소, 극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때 민주주의의 대표를 참칭하는 ‘최소민주주의’는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와 동일한 위상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현을 위해 요구되는 일련의 절차, 수단의 지위를 갖게 된다. 물론 그런 위상이 부여된다고 해서 법, 제도 등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는 없는데, 그 법과 제도 또한 지배자들이 내린 하사품이 아니라 그들에 맞서 싸운 대중의 눈물과 피가 기입되어 있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소, 극복되어야 할 장애들은 무엇인가.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에게 기본권으로 주어져야 할 노동3권을 부정하는 자본의 행태, 가부장체제에 터를 잡아 여성의 노동과 성을 착취하는 행태, 소수자들을 배제-차별하는 행태, 특정 지역을 ‘내부식민지’로 삼아 혐오의 정치를 구사하는 행태 등이 그것이다. 나아가 그런 행태들을 낳고 있는 구조적 관계들을 고치는데 머뭇거리는, 아니 오히려 폭력적, 이데올로기적 기제들을 동원하여 그 구조들을 유지, 재생산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움직임 또한 심각한 장애가 아닐 수 없다. 그럼 다시 질문해 보자. 이 나라는 과연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가.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현재-미래, ‘국경’을 넘어선 연대

 

한국 민주주의운동, ‘보수-수구 독점의 정당-정치구조’를 넘어야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 91년 5월투쟁, 97년 노동자총파업, 그 이후 단속적으로 일어난 촛불봉기들은 한국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였다. 그것을 통해 권위주의 정권, 유신체제와 같은 ‘공개적 독재체제’ 등을 무너뜨리고 재권위주의화의 흐름을 제어하며 정치적 자유화의 진전 등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그런 대중봉기들을 계기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로의 진화는 ‘민주정권들’의 집권과 함께 오히려 교착상태에 빠져버리곤 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집권 이후 그 봉기들에서 제기된 대중의 다차원적 삶의 요구들을 자신들의 과제로 삼아 실행치 않기 때문이다. 현 문재인 정권의 등장을 가져온 촛불봉기는 국정농단의 책임을 물어 대통령 박근혜의 하야, 탄핵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요구목록에는 정경유착을 일삼는 재벌의 개혁, 비정규직 노동의 권리보장, 성폭력 문화의 해소 및 성평등 실현,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검찰 및 사법부의 적폐 청산, 노동자들의 기본권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촛불혁명=선거혁명’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 ‘4·19혁명’이 제기한 요구들도 이승만 정권의 퇴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정권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부를 축적한 관료독점자본에 대한 처벌, ‘못 살겠다 갈아 보자!’를 외쳐야만 할 정도로 악화된 민생고 해결, 대중통제기제로 이용된 적대적 남북관계의 해소를 위한 민간교류의 활성화, 종속적인 한미관계의 재편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장면 정권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고 실망한 대중이 지지를 철회하는 가운데, 5·16군부 쿠데타로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그런 과정들이 반복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전쟁 이후 보수 자유주의, 수구 정치세력들이 두 축이 되어 작동하고 있는 ‘정당-정치구조’를 들 수 있다. 모든 대중운동에는 주체와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운동의 역사는 그 대상이 혁명적 봉기 이후에도 계속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 남아 혁명을 수습하는 주체가 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예로 ‘4·19혁명’의 직접적인 대상인 자유당은 7·29총선 전까지 집권정당으로서 민주당의 파트너가 되어 정국을 수습하는 역할을 했다. 혁명의 대상이 혁명주체인 대중들의 요구들을 다룬다면,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명약관화한 것 아닌가.

 

이처럼 우측으로 쏠린 정당체제는 애초 대표성의 빈곤으로 다양한 의제들을 다룰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현 정권과 집권당이 자신들이 내건 ‘법과 제도적 개입을 통한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이라는 질서자유주의적 모토조차 가볍게 여기는 상황에서 재벌 개혁은 고사하고 어떻게 ‘비정규직 제로’를 실현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적 페미니즘과 온정적 가부장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자본에 포섭되어 착취당하면서 가부장체제에 의해 억압받는 가난한 여성들의 이중고통을, 성소수자의 권리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고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반복적으로 발화하였던 ‘성폭력 피해 호소자’라는 언술을 단순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증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교착과 관련,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정당-정치구조로 인해 현실적 대안의 선택지로 존재하는 것이 수구적인 성격을 지니는 정치세력이라는 점이다. 근대 이후 동서의 어느 정치사가 ‘진보의 대표’를 자임하는 보수자유주의의 오류와 한계를 ‘보수’를 자임하는 수구 정치세력이 해결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가. 그 결과 민주주의운동을 통해 사회변화의 에너지를 만들어도 그것은 보수자유주의와 수구 정치세력의 집권경쟁이라는 틀 속에서 진자운동하며 의미 없이 소진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학습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심화는 대리자인 그 누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기존 정치세력들, 그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결속력이 빈약한, 혹은 거의 부재한 이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민주주의운동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자 지금까지의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운동의 주체들이 기존 정당-정치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하고 만드는 것이다. ‘선거는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는 것,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상식의 뒤에 숨어서는 결코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해소, 극복할 수 있는 대안에 이를 수 없다. 상식은 지배하는 자들의 이해와 욕망을 다소 우아하게 포장해 놓은 언술이기에 그렇다.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현재-미래, ‘국경’을 넘어선 연대

 

민주주의운동의 주체들, 국가를 넘고 가로지르는 연대

 

애초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통치의 실현은 그것을 막고 있는 모순과 긴장이 극복된 사회, 이른바 ‘코뮌사회’의 도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루소(J. J. Rousseau)가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동일성’은 그가 살던 당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자신을 끊임없는 운동으로만 표현한다.

 

이로부터 민주주의는 그 인지,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기존 질서 속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혜택을 누리는 이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랑시에르(J. Ranci?re)를 빌려 말하면, 그들은 기존의 질서 속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자들이지 그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위해 ‘정치(politics)’를 수행하는 이들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들이 약자 앞에서 ‘치안(police)’과 ‘준법’을 강조하는 이유 또한 이 지점에 있다.

 

민주주의는 기존 질서에 포섭되거나, 그 경계, 혹은 그 밖에서 타자화되어 고통받고 있기에 그것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갈 수 없는 이들이 처하고 있는 삶의 언어이다. 그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한가한 담론이 아니다. 현실의 민주주의가 항상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일그러져 있는 이유이다. 따라서 자랑스럽다는 듯이 ‘민주주의의 완성’을 말하거나 심지어 ‘민주주의의 과잉’을 역설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지난하게 계속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운동이 요구하는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연대이다. 민주주의운동은 인간 사이의 관계들을 가르고 나눈 후 경계를 세워 단절시키는 기존 질서를 허물어 자유-평등의 코뮌적 관계들을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혹은 조합주의적 이익을 위해 또 다른 경계를 만들고 그 너머에 그 어떤 타자를 설정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운동에 내재된 연대성, 해방의 성격과 배치되는 것으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애초 해방의 언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민주주의, 그것의 담지자로서의 민주주의운동은 근대국가의 등장과 맞물려 발명된 관계로 아직도 국가, 국민(민족)이라는 경계에 눌린 채, 그 성격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주춤거리기 일쑤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중학살은 어떤가. 그것은 1980년 5월 이 땅의 남도에서 자행된 학살과 무엇이 다른가. 여전히 국경 밖의 다른 나라, 다른 지역, 다른 국민, 다른 민족의 수난일 뿐인가.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이다. 지구 도처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국가, 국민, 민족의 다름을 넘고 가로질러 투쟁하는 미얀마 민중들을 지지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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