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 > 인권위가 말한다 > ④ “의족은 신체의 일부인가?”
20년간 인권위만이 적극적으로 답해야 했던 물음과 앞으로의 물음[1]

인권위가 말한다 [2021.10] ④ “의족은 신체의 일부인가?”
20년간 인권위만이 적극적으로 답해야 했던 물음과 앞으로의 물음[1]

글 김원영(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1] 김원영 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시대에 큰 획을 긋겠다며 출발했을텐데 글쎄… 스무살쯤 되어 생각하니 모든 게 모호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도 몇몇 의제에 있어서는 우리 사회에 굵직굵직한 질문을 던졌고 어떤 사안에 있어서 작은 변화나마 도모하지 않았나 하는 평가가 과도한 자기도취는 아닐 듯합니다. 딱 그런 기준에 따라 5개의 결정을 꼽아 격월간지에 곱씹는 지면을 마련해보았습니다.
20년, 9000여 결정 중 다섯 꼭지라니. 타이밍, 분야의 안배, 무엇보다 청탁의 용이성으로 선정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의족은 신체의 일부인가?

 

20년 전 국가인권위원회가 문을 열자 장애로 인해 차별을 받았음을 호소할 곳이 마침내 생겼다. 식당에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출입 거부를 당했을 때, 학령기가 된 장애아동에게 친절한 얼굴로 통학이 불가능한 특수학교를 소개하는 학교장을 마주했을 때, 택시에 타려는 순간 휠체어를 확인하고서 내달려버리는 택시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학교장의 이름과 자동차 번호판을 외우며 울분을 삼키던 사람들이 취할 마땅한 조치는 없었다. 2001년 인권위원회가 서울 중구에 개소한 순간 수많은 이들이 마음속에 기억했던 이름들과 차량번호를 상기하며 가지각색의 사정을 전화로, 인터넷 홈페이지로, 편지로 호소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인권위원회는 이제 한 해 천 건이 넘는 장애인차별사건을 다룬다. 장애인차별사건을 해결해달라며 진정을 제기한 사람들은 인권위의 조사결과가 늦게 나오거나,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인권위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제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인권조례에 근거해 설립된 인권기구를 비롯해 인권위원회가 하던 역할을 나누어 가진 기관도 존재한다. 인권위는 ‘호소’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의미를 지니는 기관이 더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인권위원회가 아니라면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사건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는 이를테면 1970년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물음과 관련이 있다. 그는 한 책에서 물었다. “흰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시각장애인의 몸은 어디서 끝나는가? 손이나 발끝인가, 지팡이의 끝부분인가?” 이 질문은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사고실험이기도 하지만, 인권위원회에는 이러한 물음이 실제 어떤 사람의 삶에 절실한 문제로서 찾아온다.

 

2011년 아파트 경비노동자 A씨가 눈을 치우다 넘어졌다. 그 과정에서 한쪽 다리 대신 그의 체중을 지탱하던 의족이 파손된다. A씨는 일을 하다 사고를 당했고 당장 생활에 지장이 생겼으며 업무를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으므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른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이 법에 따른 요양급여는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며, 재해근로자의 재활 및 사회 복귀를 촉진”하는 등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제1조) 하에 지급되므로, A씨가 요양급여를 청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겪은 사고가 요양급여의 지급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처분을 한다. 왜 그랬을까? 법에 따른 요양급여는 “근로자가 업무상의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를 요건으로 하는데, A씨의 의족이 파손된 일은 그가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한 것이다.

 

A씨는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지만 1심과 2심에서도 모두 같은 이유로 패소했다. ‘부상’은 사람의 몸, 신체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었다. 법률의 해석은 그 문언(법률에 글로써 쓰인 말)을 함부로 벗어나서는 안된다. 선거로 선출되지도 않은 사법부의 엘리트들이 법을 창조하는 일은 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거로 선출된 우리 입법자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라. 그 가운데 의족을 착용한 노동자가 눈을 치우다가 의족이 파손되는 사태 따위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사법부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로) 보수적인 문언해석을 하고, 입법자들은 미처 상상하지 못하여 개인의 경험을 제도화하지 못했을 때, 이 중간 지대에서 누군가가 공식적인 견해를 밝힐 필요가 생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비록 많은 한계 속에서도 지난 20년간 해온 일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일 테다.

 

A씨의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던 2014년 1월 13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대법원에 위 사건에 대한 의견을 제출했다. 인권위의 주요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요양급여 대상에서 의족과 같이 신체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보철을 제외하게 되면, 장애인 근로자는 비장애인 근로자와 유사한 부위에 피해를 입어도 장애인근로자만이 요양급여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는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세계 장애인권리협약으로부터 나오는 평등의 요청에 반한다. 둘째, 근로상황에서 ‘의족’을 근로자의 신체가 아니라고 볼 타당한 이유가 없다. A씨는 “의족을 사용함으로써 생물학적 다리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어 당해 사고 발생 전까지 무리 없이 본인의 업무를 수행해왔다.” 이때 의족은 “불편과 기능상의 필요를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측 다리를 완전히 대체하여 생물학적 다리와 같이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족이나 의수, 흰지팡이, 안내견, 휠체어와 같은 보조기기나 지원동물이 그저 나와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은 일상 전반에서 오랜 시간 몸의 일부분으로 작동한다. 산업재해로 인해 부상을 입었을 때 어디까지 요양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마땅한지는 물론 논의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노동자의 신체 일부가 되어 그 노동의 핵심적인 기능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의족을 그저 생물학적인 신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요양급여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이 있다. 이 ‘의문’은 철학적 사변을 넘어 장애를 가진 몸의 경험에서 시작되는 타당한 물음이다. 인권위원회는 이 물음을 장애인차별금지법의 법리 속에서 재구성하기 위해 애썼다고 볼 수 있다.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A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업무상 재해로 인한 부상의 대상인 신체를 반드시 생래적 신체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의족은 단순히 신체를 보조하는 기구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다리를 기능적·물리적·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장치로서, 업무상의 사유로 근로자가 장착한 의족이 파손된 경우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요양급여의 대상인 근로자의 부상에 포함된다”(대법원 2014. 7. 10. 선고 2012두20991판결)

 

국가인권위원회가 앞으로 보내게 될 20년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처럼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를 신속히 구제하고 필요한 정책을 권고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간은 앞서 살펴본 의족에 대한 요양급여 사건처럼, 기술과학이 열고 있는 급격한 사회변화의 한가운데서 제기되는 물음이 인권의 주제로 떠오를 것이다. 인간의 몸과 정신의 경계, 자율성과 평등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 매우 철학적인 물음들이, 구체적인 개개인의 절박한 삶의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비슷한 경험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입법자들과, 함부로 법을 창조해서는 안 될 사법부 엘리트들 사이 공간에서 인권위가 마주할 새로운 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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