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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스무 살의 이야기

특집 [2021.11] [20년의 시작] 극심한 진통 끝에 탄생한
국가인권위원회 스무 살의 이야기

우리나라의 인권기구는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토대로 민주화와 인권 개선에 대한 국민의 오랜 열망, 수년간에 걸친 인권시민단체의 노력, 그리고 정부의 의지가 함께 어우러져서 출범하였다. 1993년 6월 10일, 10개의 민간단체 회원 21명으로 구성된 ‘유엔 세계인권대회를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인권대회 공대위’)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세계인권대회(World Conference on Human Rights)에 민간단체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대회 내내 인권대회 공대위의 마음을 흔든 것은 ‘국가인권기구’였다. 오랫동안 국내 정치의 민주화에 힘을 쏟느라 국제사회에 눈 돌릴 틈이 없었던 탓에, 인권을 전담하는 국가기구는 그 자체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했던 인권활동가들은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설명을 처음 접하고 “정말 그런 게 있나? 그게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면 굉장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내로 돌아온 인권대회 공대위는 우리나라에도 국가인권기구 설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유엔인권위원회 결의(1992/54)와 「파리원칙」이 정한 바에 따라, 인권 보호와 향상에 관한 연구·조사 및 교육·홍보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 설치를 위한 법률 제 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국가인권기구 설립 요구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정치권의 움직임이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앞둔 1997년 11월 15일, 김대중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주요 대선공약 중 하나로 ‘인권법 제정 및 국민인권위원회 설립’을 발표한 것이다. 특히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대한 의지가 강력했다. 이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인권법 제정 및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대한 열망은 현실이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이를 포함하였고, 인권 개선을 국정지표의 하나로 삼는 등 ‘인권 대통령’을 자임하였다.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제도권 내에서도 급속히 진전되었다.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발맞춰 법무부는 1998년 3월 28일, 가칭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를 연내에 설치하고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없도록 민간 차원에서 인권위를 구성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새 정부가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고 민간단체들이 공추위(공동 추진 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인권위 설립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가장 큰 걸림돌은 국가인권기구의 권한과 독립성을 둘러싸고 나타난 정부와 인권단체 간의 견해차였다. 우리 국가인권기구 입법 과정의 가장 큰 모순은 인권위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될 법무부가 인권위의 지위와 기능을 정하는 법안을 기초하고 입법 과정을 주도했다는 데 있었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법무부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에 대한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 여부가 최대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권단체들은 애초부터 일관되게 인사, 예산, 법령, 기타 내부운영에 필요한 모든 사항에서 헌법기관에 준하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법무부는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 설치에 강력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1993년 6월 14일부터 2주 동안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세계인권회의 장면
1993년 6월 14일부터 2주 동안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세계인권회의 장면

 

「인권위법」 제정을 둘러싼 각 정당과 법무부, 시민단체 간의 치열한 공방은 해를 넘기며 계속되었다. 2000년 11월 29일 민주당 인권특위에서 확정된 법안은 인권위의 독립성은 보장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실질적인 독립성 보장을 위해 상임위원 수를 최소 6명 둘 것, 인권위원은 전원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차를 거치고 퇴직 후 2년간 공직 취임 및 공직 선거 출마를 금지할 것, 성역 없는 조사권을 보장할 것, 「인권위법」 시행에 관한 사항은 전부 인권위 규칙에 위임할 것, 위증과 허위진술, 증거 날조 등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둘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정부의 분명한 입장표명이 없는 채로 법안 제정은 차일피일 연기되었다. 이에 인권단체들은 2000년 12월 18일부터 명동성당 앞에서 인권 2대 현안의 연내 해결을 위해 “가라 국가보안법, 오라 국가인권위”라는 구호를 내걸고 연합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2000년 12월 말, 국가보안법 폐지와 국가인권위법 제정을 요구하는 인권활동가 연합단식농성 현장된 세계인권회의 장면
2000년 12월 말, 국가보안법 폐지와 국가인권위법 제정을 요구하는 인권활동가 연합단식농성 현장된 세계인권회의 장면

 

“인권위는 독립적인 국가기구로 설치되어야 하며,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여 각종 인권침해를 직접 조사하고, 시정명령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구로 탄생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독립을 요구해 온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민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인권기구를 원합니다. (중략) 우리는 인권이 짓밟히는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인권피해자들과 살 맞대고 사는 삶, 이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권피해자들을 만나 상담하고, 조사하고, 그들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바삐 뛰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인권활동가들이 모든 활동을 접고, 그것도 엄동설한에 단식농성을 하는 것은 그만큼 이들 인권 현안들의 중대성 때문입니다.”

(인권 2대 현안 연내 해결을 위한 인권활동가연합 단식농성단 성명 중에서)

 

엄동설한에 시작된 노숙 단식농성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이 왜,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시민들은 ‘도대체 국가인권기구가 무엇이기에 저렇게까지 하나’라며 관심을 보였고, 명동성당 앞으로 지지 방문을 하러 오는 이들도 늘어났으며, 점점 더 많은 언론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인권활동가들은 13일간의 단식농성을 마친 뒤에도 국회 앞 집회, 민주당사 앞 릴레이 시위 등을 이어가며 국회를 압박했다. 그러자 사생결단의 각오로 나선 인권단체들의 모습에 대통령의 마음이 움직였고, 재검토 지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인권위를 독립적 기구로 설치한다는 데 합의했지만 권한을 완전히 보장받지는 못하였다. 3년간 이어진 시민사회와 정부 간의 줄다리기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권위법」이 통과되었지만 인권위의 위상과 권한을 둘러싼 진통은 끝나지 않았다. 정부는 독립적 국가기구라는 독특한 위상과 전례 없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기관 출현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고, 암울했던 권위주의 시대를 넘어 민주주의 공고화 단계에 접어든 우리나라는 사회 각 분야에서 인권침해 근절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꾸준히 마련해 나갔다. 1990년대 이후 인권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도, 관행 등 인권 보호를 위해 개선할 문제가 산적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국민의 인권의식 제고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국민의 오랜 열망, 수년간에 걸친 인권단체의 노력, 그리고 정부의 의지 및 국제사회의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대한 관심이 함께 어우러져서 2001년 11월 25일 인권위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국가기구의 탄생이자,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인권 보호·신장을 위한 제도적 기틀’ 마련이라는 뜻깊은 이정표가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인권위의 출범은 단순히 국가기구 하나가 생긴 것이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치열한 논의와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 역사적 필요에 의해 태어난 종합적 인권 전담기구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인권위 20년간 2021. 6. 기준 총 1,050건의 정책권고와 8,612건의 인용결정을 했다. 사형제, 호주제 폐지에 대한 의견표명처럼 헌법재판소, 국제사회와 우리 시민사회에서 논의되던 굵직굵직한 건들이 있었는가 하면 ‘살색’ 크레파스, 일기장 검사 등과 같이 우리 생각의 페러다임을 전환시키는 작지만 본질적인 건들도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은 작건 크건 개인적,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그 중 몇 건을 통해 인권위원회의 존재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김창국 초대 인권위원장과 인권위원들이 참석한 인권위 현판식 (2001. 11. 26)
김창국 초대 인권위원장과 인권위원들이 참석한 인권위 현판식 (2001. 11. 26)

 

오랜 숙원의 해결을 위한 첫발

 

-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 등 구제를 위해 「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법률안」(형제복지원 특별법안)의 조속한 법률 제정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국가기관과 그 종사자에 의한 반인권적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외교부장관과 법무부장관에게 「강제실종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강제실종보호협약) 비준·가입 재권고를 의결했다.

 

- 선감학원 사건 : 과거 국가기관에 의해 발생한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생존자 구제를 위해, 국회의장에게 현재 계류 중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개정하거나 특별법 제정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새로운 의제를 사회에 던진 것

 

사문화되다시피했던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현재 폐지), 주민등록번호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출범까지 견인하며 정보인권에 대한 국제동향 및 기준을 소개하고 정보인권 현황과 국가의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국제사회가 정보통신기술의 선도국인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보인권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고 있다.

 

 

일관성과 효율성으로 작동하던 국가기관 결정에 인권적 관점으로 중심을 잡아준 결정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일방적 침공이 UN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전쟁이며 수십만의 생명을 유린할 수 있는 반인도적 행위임을 비판하는 국제적 여론에 주목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위협받고 있는 세계평화가 곧이어 한민족의 생존에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깊이 우려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법 제19조 제1호 및 제25조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정부와 국회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다.

 

 

우리 일상의 변화를 시민과 함께 견인

 

카지노 딜러에 대한 염색강요, 업무수행과 무관한 용모규정 문제, 불특정 다수가 이름을 알 수밖에 없는 교복 고정식 명찰의 문제, 청각장애인에 대하여 바이크 탑승을 제한하고 있는 조례 규정의 문제 등 당연시했던 일상에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권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인권위는 국민의 인권의식을 대변하고 국민적 요구 수준에 비례하여 성장하는 기구이다. 우리보다 먼저 국가인권기구를 설립한 나라들의 경우, 국민의 인권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인권문제가 사회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이에 따라 진정 건수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차별에 대한 감시 및 구제를 중점 업무로 하는 선진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국민의 기대 수준은 갈수록 높아지며, 사회 변화와 다양성의 폭이 커질수록 국가인권기구에 요구되는 역할과 책임도 확대되고 있다.

 

극심한 진통 끝에 탄생한 국가인권위원회 스무 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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